사설
경계와 사랑
최근 한국교회의 주된 단체 행동의 주제는 동성애와 이슬람에 대한 대책일 것이다. 지난 4월 11일 개최된 이웃 교단의 이슬람 대책 세미나에서 발표한 슬로건이 “한편으로 경계하고 한편으로 사랑하라”였다. 이는 일면 분노와 전투심으로 점철된 기왕의 한국교회의 자세에서 한걸음 나아간 느낌을 준다. 즉, 이슬람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가 아닌 경계와 포용이라는 양 날개로 효과적 선교전략과 방법론을 함께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이슬람의 결혼관과 여성관을 비판적으로 개진한 강의들로 ‘경계’가 강조되었고 이어 난민 대책이나 무슬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강의들로 ‘사랑’이 강조되기도 했다. 형평성 있게 배치된 강의 순서였지만 결과적으로 후자는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냉정하게 볼 때 주최측 관계자들의 주된 논조는 ‘경계’에 무게 중심이 있었다. 그만큼 현재 이슬람의 도전적 상황이 심각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음을 반증한다.
이런 반응과 대처 방식은 최근에 교계의 지속적인 이슈의 동력이었던 동성애 반대 운동이나 이단에 대한 대처에도 연결된다. 안팎의 반기독교적 환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 경계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필연 분노 섞인 전투적 자세로 진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차제에 우리는 그 경계의 전투적 자세가 진정한 사랑을 동반하고 있는가 성찰해 봤으면 한다.
우리는 이슬람 문제나 동성애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미 일상에서 불신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 앞에서의 불경과 범죄를 멀리하기 위해 거룩한 싸움을 싸우며 그들을 경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들을 경계하고 멀리하기만 한다면 누구에게 선교하고 주의 사랑을 전하겠는가.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경계와 사랑이 동시에 발동되지 않는다면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예컨대 땅 밟기라는 명목으로 사찰 뜨락을 기도하며 돌고 단군상이나 불상을 부수는 등, 일상에서 다른 종교의 외적 장치들을 공공연하게 훼파하는 것은 지혜로운 신앙적 결행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다종교 사회에 종교 전쟁을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것은 오래 전 십자군 전쟁의 그림자이다. 7차에 걸쳐 장기간 진행된 십자군 전쟁사에서 필히 잊지 말 것에 대해 박상봉 교수(합신)는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을 버리고 참혹한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대한 경계”라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생한 종교 전쟁은 한 번도 교회와 인간을 유익하게 한 적이 없었다. 전쟁은 최후의 수단으로 간혹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것을 아픔과 절망으로 빠뜨리는 악으로 전락한다. 더욱이, 성전(聖戰)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은 최고의 악이기도 하다. 이교도들을 무력으로 결코 돌이키게 할 수 없다. 더딜지라도 인간의 마음과 양심을 복음으로 설득하는 것,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십자군 전쟁과 그 의미” 본보 786호)
이슬람에 대한 숨은 증오심을 표면에 드러내며 과격하게 대응하는 경계가 너무 강조되면 사랑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잔뜩 경계하는 마음만으로 어떻게 충분한 사랑과 선교가 가능하겠는가. 박 교수는 이렇게 덧붙인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피는 피를 낳으며 그리고 칼의 잔혹함은 칼의 잔혹함을 낳을 뿐이다. 우리의 싸움은 원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자신의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기독교인들이 피를 흘려 희생될지라도 결코 잔혹함으로 이교도들의 피를 흘리지 않게 하는 헌신을 요구하는데, 이 목적은 영토 정복에 있지 않고 인류의 구속에 있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 사실에 대한 망각이다.”
동성애 반대 운동 또한 결과만을 추구하며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동성애 자체는 경계하며 반대하더라도 동성애자 당사자들을 어떻게 주의 사랑으로 이해하고 문제 해결을 도우며 그들을 선교할 것인가에 대한 사랑의 대책도 함께 고민하며 이제는 내놓아야 한다. 나아가 이단과 세속 세력에 대한 싸움에 대해서 안상혁 교수(합신)는 “국가는 질서 유지를 위해 칼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으나, 교회는 오로지 복음적이며 영적인 치리를 행사한다. 따라서 교회가 물리적인 폭력이나 칼의 권세를 행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면서 이러한 정황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단의 오류와 정통신앙의 옮음을 성경과 교리로 증명해 내는 것이 매우 필요하지만 이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바른 신학이 맺는 아름다운 열매를 통해 세상 속에서 정통적 신앙과 교회의 옮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역사적 ‘종교재판’에 대한 개혁주의적 성찰과 평가” 본보 789호)라고 강조한다.
사회적 문제까지 야기하는 우리 안의 다른 죄악과 탐욕의 우상들에는 지극히 관대하면서 유독 가시적 우상들에만 분노하며 행동주의적 물리적 전투를 불사하고 있지는 않나 재고해야 한다. 경계와 사랑을 동시에 발동하며 지혜로운 대책과 방법론을 찾아 우리 앞의 난제들을 성경적으로 극복해 가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거론한 몇 가지 난제에만 매몰되지 말고 신앙의 전체적 성숙을 위해 관심을 함께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