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의 자기 감정주의_이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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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의 자기 감정주의

이여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3년

들어가며

“수련회는 6개월짜리 주사약이야. 약효가 떨어질 즈음이면 다음 수련회가 
시작되지”(어느 기독교 동아리 간사). 
방학과 함께 거의 대부분 대학가 기독교 동아리는 수련회를 떠난다. 내가 활
동을 하던 그 기독교 동아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말고사가 시작될 즈음부
터 선배들은 후배들을 수련회에 데리고 가려는 노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다. 
그리고 선배들의 이러한 동기부여와 기도로 못 간다고 혹은 안 간다고 하던 
후배들도 대체로 수련회에 참석한다. 이번 수련회에는 ‘은혜’를 받아야 하
고 내가 좀 바뀌어야 한다는 일종의 부담감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수련회에
서 찬양을 통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마지막 날 저녁에 찾아온 선
배들과 함께 그 ‘은혜’를 나눈다. 때로는 마지막 날까지 전혀 은혜를 받
지 못해서 스스로 뭔가 잘못되지 않았는지 자책을 한다. 
교회에서 많
이 듣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이 ‘은혜’라는 말이다. 
“목사님, 오늘 설교에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전도사님이 찬양을 인도하면 얼마나 은혜가 있는지 몰라요.” 
“요즘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해도 은혜가 없어.”

은혜? 은혜!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이 ‘은혜’라는 말에 일종의 의심을 품게 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 변
치 않는 언약적 사랑이다. 그런데 이러한 뜻을 요즘 쓰는 ‘은혜’에 대입해
보면 대체로 문장이 전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
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감동이 있었다는 뜻을 나타낼 때 ‘은
혜를 받았다’는 표현을 쓰기 때문이다. 
“목사님, 오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즘 우리 전도사님이 찬양을 인도하면 마음에 감동이 와.” 
“요즘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해도 아무 느낌이 없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굳이 ‘은혜’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런 표현에 대한 아무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은혜’가 ‘감동’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이면에 감정을 중시하는 신비주의의 영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배제하고 내적 체험과 경험만 중요시한다. 신비주
의는 인간의 이성, 감정, 의지의 삼대 요소 중에 감정적인 면만 강조하고 방
언, 신유의 은사,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한때 유행하던 부흥회나 부흥
사들이 바로 이런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교리를 바르게 전하는 것과 상
관없이 성도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즐거움을 주면 탁월한 부흥사로 인정을 
받았다. 
정(情)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기질과 교리를 말하지 않고 정 측면으로 접근
한 부흥사들의 방법이 맞아떨어진 면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이러한 부흥회 
문화의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가 방언이나 신
유의 은사,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감정적인 면을 특
히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 하나님의 형상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고 한
다. 신학자들은 형상과 모양의 의미를 구분하여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사
실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는 상호보완적인 개념
이다. 두 단어는 공
통적으로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라는 개념을 가리킨다. 
이레니우스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유스러운 성품 다
시 말해 타락시에도 상실되지 않는 성품”을 의미했다. 이레니우스의 이러
한 견해에 이어 어거스틴도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으로 보았다. 이것은 고대 
헬라철학의 영향인데 복음이 로마에서 “상황화”되는 과정에서 기독교 진리
가 헬라 문화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당시 로마는 정치, 경제적으로 로마이었
지만 그들의 정신 체계는 헬레니즘이었기 때문이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는 말씀에서 지혜
와 관계되는 것이 이성 혹은 이지적 작용이다. 즉 헬라인들은 지성(이성)을 
강조하였고 상황화에 앞장선 교부들도 이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아퀴나스에게도 이어졌다. 아퀴나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주로 인간
의 지성이나 이성에서 찾았다. 

전인적인 신앙

사실 지, 정, 의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시하는지는 각자 삶의 정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자기의 삶의 상황에서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선순
위가 바뀔 수 
있다는 것과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성만 
혹은 감정이나 의지만 하나님의 형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
을 어느 한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을 영-육
으로 구별하여 보는 것보다 통일체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이러한 전인적인 신앙이 부족하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가늠하는 데 전적으로 자신의 감정적인 부분에 의존한다. 내가 기쁘
고 내가 감동을 받으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이고 나에게 아무 느낌이 없
으면 하나님이 내게 무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신앙
의 ‘자기 감정주의’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확신이 흔
들리거나 옅어지면 신앙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것이다. 
대학 때 내가 활동하던 기독동아리 간사가 수련회를 ‘6개월짜리 주사’라
고 한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비슷한 맥락이다. 수련회 때 마음에 감동을 받
은 것이 6개월 정도 지속되는데 그 약효(?)가 사라질 즈음 다시 수련회에 가
서 다시 감동을 받아서 다음 수련회까지 살아간다는 것이다. 
후크마는 인간을 전인으로 이해
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면서 교회가 전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말씀의 전파와 가르침에 있어서
도 교회가 담당하는 사람들의 마음뿐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의지에도 관심
을 기울여야 한다. 단지 하나님과 성경에 관한 지식적인 정보만 전달하는 말
씀의 전파는 대단히 부적합하다. 듣는 자들은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감화
되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후크마가 ‘감정과 의지’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을 강조한 것은 서구인들이 
지적인 것에 관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후크마의 지적을 우리의 현실에는 
이렇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칠 때 교회가 담당하는 사람들의 감정뿐 아니
라 그들의 마음과 의지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감정
만 북돋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에 관한 지적인 관심도 자극해 주
어야 한다. 듣는 자들이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감화되어 하나님을 찬양하
는 중심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바른 인식
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