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 번제(一千燔祭)에 대한 이해와 문제점
박형택 목사
<화평교회, 한기총이대위, 현대종교편집위원>
요즈음 일천번제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여 문의가 쇄도하고 있고 피해 사례도 접수되고 있는 실정
입니다. 주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일천번제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교
회에서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데 한 번에 만원씩 천 번을 하는 식으로 정한
금액을 천 번을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천 번의 헌금을 지극 정성으로
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성도들이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서점에 가도 버젓이 일천번제 헌금봉투가 예쁘게 인쇄되어 팔
리고 있는 실정인 만큼 일천번제 헌금은 현하 한국교회에서 아무런 제재 없
이 행해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일천번제는 헌금뿐 아니라 기도에도 일천번제를 사용하는 경우를 봅니다. 신
월동 동아교회(강창훈 목사)에서는 1,000
일기도 즉 일천번제 기도를 2년 9개
월 동안 매일 이어가고 있는데 천일 작정기도회의 힘이 교회성장의 원동력
이 된다고 합니다. 강목사는 “1,000일 작정기도회”(예솔)라는 책을 내기
도 했는데 2001년부터 24차례 전국 목회자와 사모 세미나를 하면서 800여 개
의 교회가 “1,000일 작정기도회”에 동참하여 성도들을 깨우는 역사가 일어
나고 있다고 합니다. 강목사의 책 내용을 보면 그가 합천 해인사에서 3,000
번 절을 하고 삭발한 후에 행자승이 된 일이 있었고 그후에 신유은사집회에
서 주의 종으로 변화 받았다고 합니다.
또 기도혁명교회(최옥석 목사)는 일천번제를 일곱 번 하는 칠천번제 예배를
드렸는데 기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일천번제본부” 산하에
기도총신연구원, 세계칠천번제본부, 칠천번제대성회, 세계기도올림픽, 세계
기도운동본부, 기도방송국, 기도타임지, 세계장로권사영성원, 신부단장원,
영적성경번역출판부 등 다양한 기관을 설립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심지어 태신자 전도를 위한 일천번제 전도운동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성
결교 류우열 목사). 그에 따르면 태신자를 정하고 그를 위해서 일
천번제를
드리면서 기도하며 관계를 맺고 전하는 방법인데 새벽기도시간에 헌금봉투
를 준비하여 태신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일천번제 횟수를 기록하고 봉헌자의
이름도 기록한 다음에 1천원씩 천 번을 드리면서 기도하면 성령의 역사가 나
타날 것이라고 강조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서울의 모 교회는 1997년 4월 6일 21세기가 되는 새천년이 1,000일이 남았다
며 일천번제에 동참할 것을 성도들에게 호소하였는데 결국은 성전건축을 위
하여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고유번호까지 부여해
가며 헌금을 드릴 것을 독촉하였는데 그 교회가 7천명정도 되었는데 70억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일천번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기도하게 하고 전도하게 하고 헌금하게 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굳이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일천번제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들이 과연 옳은 것
인가? 묻는다면 단호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에 솔로몬이 드렸던 일천번제에 대한 이해를 전혀 달리하고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결과를
얻기만 한다면 그것이 옳든지 그르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겠다는 데는 전혀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시대가 성공위주의 시
대요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수단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는 세상풍조인
데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필자는 일천번제에 대한 이해와 그 문제점을 생각
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일천번제에 대한 잘못된 해석문제입니다.
일천번제의 근거를 열왕기상 3장 4절과 역대하 1장 6절의 말씀에 두는데 문
제는 일천번제(一千燔祭)를 일천 번(一千番) 드린 제물로 잘못 해석하고 있
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천번제는 일천 번씩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일천
마리의 제물을 한꺼번에 드린 것을 말합니다. 즉 일천번제는(one thousand
burnt offerings) 일천 마리의 양을 제물로 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을 말합니
다. 역대하 7장 5절에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 낙성식에서 하나님께 드
린 제물이 소가 2만2천이요 양이 12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물
의 분량이 그 만큼 많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천번제를 일천
번의 제물을 드린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왜곡된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
다.
둘째는 그렇다면 단순히 해석상의 문제로만 그것을 돌리고 말 것인가? 다른
이유는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본인의 생각이지만 일천번제가 기독교에서 행해진 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천배, 2천배, 3천배, 만배 등 절을 하
면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는 것을 잘 압니다. 절을 그 만큼 많이
한다는 것은 그 만큼 정성이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지극 정성으로
빌면 소원을 이룬다고 믿는 불교의 신심을 기독교에 접목하여 일천 번의 제
물을 드리면 그 만큼 정성이 커서 기도응답을 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설
득력 있게 헌금을 강조하게 된 것이라 사료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의 일부 잘못된 부흥사들과 목회자들의 헌금 걷
는 방법으로 동원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헌금종류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잘 압니다. 심지어 야곱이 자기 아
버지 이삭에게 별미를 드리고 축복을 받았는데 그것을 빙자하여 별미헌금까
지 만들어 헌금을 하게 한 해프닝도 있
었습니다. 따라서 일천번제 헌금이라
하여 작정케 한 것은 성경에는 없는 왜곡된 방법으로 헌금을 내게 하는 수단
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헌금을 걷어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잘못된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셋째는 번제에 대한 이해입니다.
번제(燔祭/burnt offering)는 짐승을 잡아 각을 뜨고 피를 내어 뿌리고 그
몸을 불태우는 제사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돈이나 금
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희
생제사였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하여 목적을 가지고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헌신의 표시였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이 번제였고 속죄제였습니
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산 제사(living sacrifice) 즉 살
아있는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로마서 12:1). 그런데 오늘
날의 일천번제는 완전히 왜곡되어 정성을 드린 후에 소원을 성취하고 응답
을 받겠다는 의도로 드려지고 있으니 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기 위하여 일천번제를 드린 것이 아
닙니다. 번제라는 말
자체가 어떤 요구나 목적을 가지고 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희생이요 헌신이라
는 의미입니다. 번제가 헌금으로 둔갑하여 드려진다면 번제의 의미를 왜곡하
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일천번제에 대하여 이해를 하고도 교회에서 일천 번의 제물을 드리는
일천번제를 시행한다면?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는 성도들 자신의 선택과 결
단에 맡기기를 원합니다. 일천번제를 하는 동기가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
지 알고 성도들 자신이 판단하여 행동할 것을 기대합니다. 목회자가 헌금을
걷기 위한 방법으로 동원되었다면 철저하게 반대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교회바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책이름은 “교회바로보기”라
는 뜻을 줄여서 한 것입니다. 성도로서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 그리고 목회자의 잘못된 행동들을 소설형식을 빌어서 기록
한 책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성도들도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서 옳은 것은
따르지만 그른 것은 따르지 않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