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과 예배찬송_ 김영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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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과 예배찬송

김영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예배에서 시편 찬송을 불러야 한다는 글이 기독교개혁신보에 두 번이나 실린 
것을 보고 예배와 찬송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필자의 견해를 말씀드리고
자 합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찬송가]에 시편 찬송이 그렇게 많지 못한 것은 유감입
니다. 더 많이 수렴되기를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는 시편 찬송이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경배하는 내용의 찬송을 드려
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편을 가사로 한 찬송만이 올바른 경배 찬송이라
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1) 예배에서 찬송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부분과 주시는 은혜에 응답하
는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부분은 말씀, 즉 성경
봉독 및 설교이며 우리가 응답하는 부분은 찬송과 기도입니다. 

시나 동요에 곡을 붙이면 
노래가 됩니다. 감사하고 찬양하며 간구하는 기도
의 시에 곡을 붙이면 찬송이 됩니다. 우리가 진심에서 울어나는 감사와 찬양
을 노래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찬송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의 은혜,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의 시편
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칼빈이 시편으로만 찬송하기를 좋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일부 보수적인 개혁파 교회 가운데서는 예배에서 시편만을 찬송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개혁주의 교회가 그것을 모델로 하여 따르는 것은 아
닙니다. 칼빈은 시편만을 찬송함으로써 찬송가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찬송하는 일을 두고는 칼빈은 오르겐 반주도 마다하고 초
기에는 화성으로 부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개혁운동이 일어나자 예배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그 중 중요한 것이 성경봉독과 설교를 회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모국어로 하
는 것과 온 회중이 이해하는 말로 함께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이 비음
악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오르간도 없이 찬송을 
단음으로만 부르도록 
한 것은 예배의 명료성을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찬송하는 일이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취한 조치였습
니다. 

2) 시편 찬송을 우리의 가락으로도 부를 수 있습니다

시편 찬송만을 옳은 찬송으로 보는 이들은 시편 곡도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부르던 곡을 되살렸으면 하고 희망합니다. 그래야 더 순수한 시편 찬송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다니엘서의 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히브리어로 쓰였습니다. 
언어는 문화의 산물이고 문화의 한 부분입니다. 음악도 역시 그렇습니다. 히
브리어가 특별하고 거룩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히브리어로 쓰인 것은 아닙니
다. 단지 하나님께서 히브리 백성을, 즉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
셨으므로 그들의 언어로 말씀을 주시고 기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약은 헬
레니즘 문화권에 살던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는 코이네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코이네 헬라어는 고전 헬라어에 비하여 격조가 낮은 말이었습니다. 


경은 일찍부터 다른 나라말로 번역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번역된 성경 말
씀 역시 하나님의 말씀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중세에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라틴어 번역만 인정하고 유럽의 나라말로 번역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종교개
혁자들은 이런 이상하고 편협한 고집에 반대하여 성경을 자기들 나라말로 번
역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우리말로 된 성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위
클리프 번역자들은 지구상에 사는 각 부족들이 자기들의 말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 번역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을 번역할 수 있다면, 아니 이제는 우리의 주제인 시편
을 다른 말로 옮겨 쓸 수 있다면,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이 거기에 붙여 부
르던 곡 역시 다른 나라말들을 낳은 문화와 같은 산물인 음악으로 옮겨 부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언어는 그 언어권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소통이 되
지 않으나 음악은 그렇지 않고 소통이 됩니다. 그 점에서 언어와 음악에는 차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을 따라 음악이 띠는 정서가 다릅니다. 음악에는 국경이 없습니
다. 그러나 각 문화의 특색은 지니는 것입니다. 영국
과 독일에 얼마간 살아 
본 사람은 양국의 찬송곡이 다름을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시대를 따라 문
화가 변하고 언어도 변합니다. 그래서 이미 번역된 성경을 새로 번역할 필요
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세속에 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설교합
니다. 교회 음악 역시 세속 음악과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구태여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이 부르던 곡으로 부르는 것
이 가장 이상적인 양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시편을 중세 사람들은 그
들에게 익숙한 가락으로 불렀습니다. 칼빈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트라스부
르크와 제네바 교회에서 부를 시편 찬송을 위하여 프랑스인 루이 부르좌
(Louys Bourgeois)로 하여금 작곡하도록 했습니다. 

강약의 박자를 가진 서양 음악은 강약의 대조가 뚜렷한 거센 엑센트를 가진 
서양말과 잘 어울립니다. 우리말에는 엑센트가 없고 높고 낮은 어조가 있을 
뿐입니다. 중국어나 일본어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동양과 서양의 음악이 언
어에 걸맞게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물론 언어뿐 아니고 미술과 사상이랑 어
우러져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들이 시편을 자기네들 특유의 가
락으로 불러 왔듯이, 우리는 우리말로 쓰인 시편을 우리의 가락으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을 위한 곡으로 쓰일 수 있는 우리의 가락이 어떤 것이냐고 의문할 수 있
습니다. 그것을 찾거나 짓는 것은 음악하는 성도들의 몫입니다. 이를테면 서
정적인 김소월의 시에 유행가 곡을 붙여 부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소월의 시의 분위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시편은 
거기에 걸맞은 곡을 요청하므로 우리 성도들이 보다 감동적으로 부를 수 있
는 좋은 시편찬송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것을 고집하려는 폐쇄적
인 생각에서가 아니고 우리 것도 시편찬송의 목록에 올려 서로 나눔으로써 시
편찬송이 더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3) 예배에서 우리는 시편보다 더 많은 노래로 찬송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시편으로 찬송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편이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대한 단순한 응답의 찬
송일 뿐 아니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께서 지
으신 만물로 인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은총을 
노래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성도의 감사와 기쁨을 노래하는 
시가 있으며, 사죄와 긍휼과 자비를 빌며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주제와 내용이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구약 성도들이 부른 찬송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이 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구약의 시편을 물
론 우리의 찬송으로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하게 여길 수는 없습니
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막연한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를 멀리
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믿고 바라던 것이 성취된 새 언약
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사는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되신 일,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이 계시된 사실, 그
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죄 사함을 주시는 구속의 은혜, 오순절 성령 강림
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출범하게 된 일, 하나님의 백성 아니던 민
족들이 복음을 듣
고 구원에 참여하게 된 감격과 기쁨, 구약의 백성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선교의 사명과 특권 등으로 인하여 성삼위 하나님께 감사하
며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덤으로 부르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약 시대
의 성도보다 하나님을 찬양할 제목이 더 풍성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찬송만이 옳은 찬송이라거나 시편 찬송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써 구약 시대의 성도들보다 더 큰 기적과 더 크신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의 내용과 제목들을 제한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을 찬송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열정을 위축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은 오랜 세월에 걸쳐 성도들이 불렀던 찬송의 모음집입니다. 초
대 교회 시대에 주로 구약의 시편을 불렀을 것이라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습니다. 신약 시대의 찬송도 세월이 흘러서 비로소 풍성해 
질 수 있는 것이었기에 말입니다. 말씀이 빈곤했던 중세 시대에 찬송만은 풍
성했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 경건
한 삶을 추구한 성도들, 18세기와 19세기에 부흥을 경
험하고 중생과 새로워지
는 삶을 경험한 수많은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간증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찬송을 작곡함으로써 신약 시대의 찬송이 비로소 풍성해진 것입니
다. 

교리의 역사는 신약 시대의 교회가 성경을 이해하는 일을 두고 발전을 거듭
해 온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응답인 찬송도 말씀에 대한 이해의 
발전과 함께 그 만큼 더 풍성해질 수가 있었습니다. 현재 여러 교회에서 부르
는 복음송 가운데는 비신학적인 가사도 있고 세속적인 티를 탈피하지 못한 곡
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이 아니므로 무조건 모두 다 타부시하는 것
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음송 등 건전한 노래들도 있습
니다. 이런 노래들 가운데서 앞으로 예배 시에 찬송가로 부를 수 있는 것들
이 조만간 선별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시편 찬송만을 고집하거나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미 향
유하고 있는 귀한 유산을 별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찬송은 날이 갈수록 더욱 풍성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경건한 시를 쓰고 작곡을 
하는 성령에 충만한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