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에서 예배에 속한 찬송의 정의
이종연[서울진명교회 목사]
교회를 개혁한 쟝 깔뱅은 여러 곳에서 “결과보다 원인이 선재한다”고 힘주
어 가르친다. 주류의 신학과 신앙을 계승한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이른바
개혁주의(칼빈주의)에서 볼 때 모든 방면에서 원인, 원천, 근거, 기본에 얼마
나 충실해왔는지 두렵다. 특히 교회의 여러 규례 가운데 예배모범, 그 가운데
서도 역사적 찬송을 계승하여 과연 우리는 어떤 열매를 내는지 자못 궁금하
다.
교회 개혁의 열매는 한 사람이 한 시대에 모두를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당
대를 놓고 생각하면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는 것으로 있다”는 원리에서, 개혁
은 예배에서 언제나 온통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겨레말로 직역하는 일
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로서 찬송 드림, 두 방면에서 열
매로 나타내야만 한다. 이 열매야말로 신학의 열매이며 거룩한 이들의 사회에
서 중심이 아니겠는가!
성경과 찬송, 이 두
요소는 예배에서 핵심인데 자칫 이것을 다 아는 것으
로 여기거나,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부패한 면역성에 빠지면 개혁이 아니
라 배교하는 상태에 접어든다. 그래서 두 요소 가운데 ‘찬송’에 대하여 무엇
보다 성경에서 그 뜻매김(정의)을 살펴서 개혁주의 예배를 개혁함에 한 걸음
내딛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시니 반석 위에 교
회를 세우자.
“이 백성을 나는 나에게 빚었도다 내 기림(찬송)을 그들은 얘기하겠노
라”(사 43:21. 필자 역). 이사야가 43장에서 우리에게 가르친 이 말씀은 평행
법과 도치법을 가지고 있어 그 문장이 매우 힘차 보인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는 ‘얘기하다’를 ‘부르다’로 틀리게 옮겼다. 매우 작은 문제를 꼬집었다고 볼
지 모르나, 계시의 속성에서 보더라도 두 말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겠는
가? 성경 원문으로 찬송의 진수를 찾아보면 얼마나 우리가 모르거나 그릇되
이 아는가 놀라리라(깔뱅도 ‘얘기하다’로 옮겼다).
개역 성경에서 ‘찬송’에 상당하는 낱말들을 찾으면 한글로는 10가지 이상
찾기 어려운데 바른 원어
성경에서는 50가지가 넘는다. 따라서 우리가 그동
안 예배에서 찬송을 얼마나 신령하게 합당하게 드릴 수 있었겠는가? 누가 이
것을 제대로 가르쳐왔는가? 이제는 이 물음에 대답할 때가 되었다. 찬송 방면
에 타락과 무지는 예배 의식을 망가뜨리고 나아가 교회관을 무너뜨린다(참
조, 바른 찬송, 도서출판 깔뱅).
찬송은 계시이다. 또한 찬송은 은혜의 결과를 원천이신 성 삼위일체 하나님
께 드림의 대표적 방편이다.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을 통한 계시를 성령님의
역사로 교회에게 맡기셨다. 따라서 마땅히 계시의 말씀을 먼저 찬송의 내용으
로 받아야 한다. 계시를 맡은 선지자와 사도의 찬송관을 보라! 더욱이 말씀
봉사자라면 찬송에도 똑같이 대해야만 한다. 아무나 찬송시를 만들 수 있는
가? 말씀 선포에 대한 객관적 능력을 구비한 사람이라야 한다. 말씀을 찬송하
라고 온통 외치시는데 어찌 찬송을 경시하거나 내용도 아무렇게나 누구나 만
들 수 있는 것으로 무시하는가?
찬송은 은혜의 결과이며 동시에 은혜의 방편이기도 하다. 흔히 말씀 선포
나 성례, 기도 등을 은혜의 수단이라고 하지만, 예배모범을 보더라도 전주에
n서 후주에 이르기까지 찬송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것은 역사적인 개혁신조를
보아도 얼마나 찬송을 중시하는가 알 수 있다. 도르트레히트 대회 결의에서
는 찬송으로 시편을 부르고 일반 찬송은 가능한 줄이자고 했다. 웨스트민스
터 표준 문서에서도 시편 찬송에 대하여 핵심을 강력하게 가르친다.
같은 신앙고백을 전제하고 같은 교회관과 성경관을 앞세워야 한다. 교회의
속성을 전투하는 교회로서 마땅히 드러내되 드림의 절정이요, 입술의 열매로
서 찬송의 제사를 당대에 개교회마다 언제나 마땅히 드려야 한다. 교회로서
보편한 사명에 참여하여 은혜의 결과를 헤아려 알아서 하나님께 검증된 말씀
을, 거룩한 공회에서 계승받은 개혁파 예배의 찬송으로 드려야 한다. 결과보
다 원인 선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