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구원의 선포 기관이어야
정중렬 장로
예수라는 단어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또는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당시의 문헌들을 보면 이 ‘예수’라
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이름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적
성격 즉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기대감이나 ‘여호와는 구원이시
다’라는 시대적인 요청이 그 시대 저변에 얼마나 널리 깔려 있는가를 보
여주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다윗 왕국이 멸망한지 680여년이 흐르는 동
안 유대인들은 속히 그 나라가 회복될 것을 소망하는 메시아적 대망을 가
지고 있었는데 그 결과가 이런 현상을 유발했을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하던 때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
태하기에 이른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
그런데 예수님의 탄
생을 예고한 주의 사자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소망과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의미를 ‘예수’라는 이름 속에 부
여하고 있다. 주의 사자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마 1:21)라고 예수의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압제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스라엘 사람
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주의 사자는 죄로부터의 해방
을 선포함으로써 영적인 구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선포에 따른
다면 예수님은 정치적인 해방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해방인 영적 구원을 위
해 오신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교회 역시 이 세상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다. 사
람들로 하여금 경제적인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에 그 존재 목적이 있는 것
도 아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그 죄로부터의 구원을 선포하는 기
관인 것이다. 그리고 구속받은 자의 삶의 방향과 질을 제시하여야 한다. 그
것이 곧 복음이다. 지난 세기 동안 한국 교회는 이 점에서 그 본연의 자태
를 상실하지 않았나 되돌아보아야 한다. 교회가 급성장한
배후에는 죄를
지적하기보다는 적당히 서로 타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반대급부가 있었음
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다가오는 시대의 교회는 그 어떤 조건이나
유혹과도 타협하면 안될 것이다. 특히 교회는 본연의 임무인 복음 선포의
권위를 잃어버리거나 함부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세속의 도전으로부터 교
회를 지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정체성을 늘 확인해야 한다. 여기에 인류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