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0℃ 최고의 나를 만나라
< 전상일 목사, 석광교회 >
“최적의 온도에서 견뎌내야 최고의 자신도 만들 수 있어”
아들을 군(軍)에 보내놓고, ‘행여나 춥지는 않은지’ 인터넷의 날씨를 살펴보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평소 관심도 없었던 최전방(最前方) 고지 철원지역의 날씨를 샅샅이 들춰보면서 말이다.
아들을 전방에 보낸 세상의 모든 부모처럼 우리 부부의 일상대화는 온통 ‘아들 녀석이 힘들지는 않은지, 눈이 오고 추워서 고생하지는 않은지’이다. 그러다가 아들이 첫 외박을 다녀간 후로 기우(杞憂)였음을 깨닫게 되고, 대한민국의 든든한 젊은이로 만들어져 감에 뿌듯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에서 지낼 때 미처 알지 못하던 것들을 터득하고, 선임 병을 통해서 많은 도전을 받으며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는 아들의 말에 괜히 머쓱해지는 듯했다. 어련히 우리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군이라는 용광로에서 잘 연단하시겠는가? 그저 부모 된 마음에 쉽고 편한 것만 생각했으니 아들에게도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아마 우리의 목회나 신앙생활에도 이런 모습이 없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최근에 접하게 된 김범진의 책, 「1250℃ 최고의 나를 만나라」를 통해서 적잖은 도전을 받았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통해서 자기 계발을 독려하기도 하지만,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 시대를 통찰하지 못하고 단지 쉽고 편한 길만 찾아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가져다준다.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 때 훌륭한 도자기가 아닌 평범한 질그릇을 만드는 경우, 가마의 온도가 800℃ 내외라고 한다. 하지만 최고의 고가를 자랑하는 고려청자나 이조백자 같은 작품을 만들 때의 온도는 1250℃라는 것이다. 그렇게 뜨거워지면 흙의 밀도는 놀라울 만큼 강하고 단단해지면서, 마침내 유리같은 빛깔을 내고 어느 질그릇과도 견줄 수 없는 매끈매끈한 청자나 백자 같은 명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어찌, 도자기뿐이겠는가? 우리도 800℃의 안락한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거나 고집하게 되면 볼품없는 질그릇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내 속에 잠재된 최고의 나를 발견할 수가 없고 최고의 나를 만들 수도 없다. 그러나 1250℃의 뜨겁고 버거운 환경이 주어졌을 때 마다하지 않고 거기서 참고, 빚어지는 삶을 살아낸다면 값비싼 고려청자나 백자의 도자기처럼 ‘최고의 나’가 되고 명품(名品)으로 만들어진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렇다. 최적의 온도에서만이 최고의 나를 만들 수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한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자꾸 되새기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
우스갯소리라지만, 요즘 파송예배나 신학교에서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는 찬송가가 금지곡(?)처럼 되었다고 한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의 목회지 선택이나 교회출석과 봉사영역에서 토기장이의 뜻이 아닌, 진흙의 선택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빗댄 말일 것이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말인 것 같다.
머지않아 질 낮은 신학교, 질 낮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질 낮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접하게 된다면, 우리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6장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병이어’라는 기적을 보여주신 주님은 왜 미처 흥분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있는 갈릴리 바다 가운데로 그들을 몰아넣으셨을까? 대답은 48절에서 분명한 것 같다. 주님은 멀리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과정’을 보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평생, ‘오병이어’같은 은혜와 복을 누리는 명품그릇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은혜의 부스러기나 겨우 먹으면서 사는 질 낮은 그릇이 될 것인지를 가늠하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다행히 ‘괴로이 노 젓는 과정’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바다 한 가운데서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1250℃의 과정을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토기장이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인생의 바다 한 가운데에 몰아 넣으셔서 빚으시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현장은 주어진 교회와 가정, 현실이다.
지금, 한국교계는 여기 저기 사건이 터지고 고난과 음해와 분열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적잖은 미(未)자립교회는 일꾼부족과 재정난으로 뜨거움의 통로를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1250℃의 뜨거움을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 앞에, 질 좋은 명품교회와 명품신학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웬만해서는 견딜 수가 없을 정도이다. 때론 우겨 쌈과 빈정거림을 당하고, 바보가 되는 순간을 여러 차례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800℃에서 머물지 말자. 볼품없는 질그릇은 시장바닥 어디가나 쉽게 찾을 수가 있다. 토기장이가 쓰실 명품 도자기가 되려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두려워말고, 1250℃에게 나를 맡겨야 한다. 반드시 주님과 이 시대가 요구하는 ’최고의 나‘가 되어 질 것이다.
지금 우리의 환경은 족히 1000‘C는 넘어 점점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 점점 목회하기 힘들고, 의를 위해 살기 힘들 정도로 뜨거움이 도처에 있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고난과 환경의 온도가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토기장이 되신 주님의 손길이 더욱 더 세밀해지고 분주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곳에서 최고의 나를 만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