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자유까지도 부정할 수 있는 자유
< 장창수 목사 >
“신앙과 윤리의 최고 경지는 자기 부정으로부터 나와”
성공과 출세가 가장 큰 가치이며 인생의 목적인 유교 문화권에서 일반적인 사상을 가진 지도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자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성공이 가져다 주는 달콤한 열매를 즐겨야 한다는 이기적인 소원이 지나치게 강하며,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권위와 권세를 초법적 또는 탈법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이런 잘못된 노력과 자세는 특히 정치 지도자들에게 역력하다.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국방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만은 이 의무에서 면제시키려 한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를 완전히 비웃는다. 이런 통치자와 지도자는 흐르는 시간과 함께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인해 서서히 부패해 간다. 쉽게 말하면 ‘자기 부정’을 모르는 소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권리를 유보시킬 수 있는 ‘자유자’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보다 한발 더 앞서 갔다.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대속물로 드렸다. 예수님이 그려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도 ‘자유자’였다. 그도 예수님처럼 한 걸음 더 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자유마저 부인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함이었다. 유교 문화권의 통치자나 지도자는 도저히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신앙의 최고 경지에 달했다고 생각할 때 흔히 목회자를 비롯한 성도는 마치 다 끝난 듯이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 때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과 칭찬을 주고 그는 이를 즐기며 은근히 자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수양(修養)을 통해 어떤 도덕적 경지에 도달함을 그 목적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독인은 진리의 깨달음을 최고의 경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본(本)을 따라 자신이 도달한 자유의 경지마저 부인했다. 그리고 기쁘게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 더 높은 차원의 헌신과 봉사로 나가기 위함이다. 이것은 성숙한 신앙 경지와 그것이 주는 만족감 자체를 부인하고 자신을 낮춤으로 비로소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자유를 부인하고 스스로 종이 된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자기 부정에 대한 노력이 부족하다면 성도들이 그 만큼 영혼 구원에 소홀할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바로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에 장애 내지 방해가 될 수 있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자신을 낮추며 기꺼이 종이 되었다. 그는 율법주의자에게 그와 같이 되었고, 율법폐기주의자에게도 그와 같이 되었다(고전 9:20-21). 그리고 할례자에게도 그와 같이 되었고, 무할례자에게도 그렇게 되어주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철저히 배우고 실천했다(빌 2:6-8).
주 안에서 얻은 자신의 자유마저 부정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신앙과 윤리의 최고 경지이다. 누구에게 이것이 가능한가? 사도 바울이 답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도들의 종이 되려면 자신의 자유마저 부정할 수 있는 자유를 소유해야 한다. 이 때 비로소 주님이 원하는 진정한 사랑의 헌신과 봉사가 가능하다. 이렇게 자기 부정은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