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날이 가까움을 명심하고 물질을 초월하여라
겔 7:12-13
故박윤선 목사
기독신자는 심판의 날을 기억하고 사는 사람이다. 롬 14:10-11에 “네가 어찌
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
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
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고 하였다. 우리가 세상에 쌓아 놓은 재산도 그날에는 소용이 없고, 도리어
그것이 주님의 일을 하지 않은 우리의 죄악을 증명해 줄 뿐이다. “너희 금
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
리라”(약 5:3).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의 날이 오기 전부터 물질을 초월하여
그날을 대비해야 된다. 우리는 무엇을 매수(買收)하고도 그리 기뻐할 필요 없
고, 무엇을 팔고도 근심할 것 없다. 우리는 물질을 초월해야 된다.
1. 물질을 초월한 신자는 물질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함
우리는 물질을 초월하여 살았던 아브라함을 잘 안다. 그는 그의 조카 롯과 헤
어져 살기 위해 자기 생활의 터전이 될 곳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롯에게 말하
기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
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라고 하며 선택의 우선권을 조카에게 양보하였
다. 이때에 롯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여호와의 동산 같고” 물이 넉넉한
땅 요단 온 들을 택하여 소돔까지 옮겨갔고(창 13:10-13), 아브라함은 산지
(山地)인 헤브론으로 장막을 옮겼다(창 13:18). 훗날 롯이 욕심으로 차지한
것은 그에게 큰 화(禍)가 되었다(창 19장). 롯과 헤어진 후 아브라함은 소돔
왕을 도와서 승전한 뒤에, 그 왕이 전리품(戰利品)을 취하라고 하는 것을 거
절하였다(창 14:21-23).
신앙의 인물 욥은 부유한 때에도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
에서 떠난 자”라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며(욥 1:2-3,8,10) 물질 때문에
범죄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재산을 일시에 잃었을 때에도 하나님을 경외하
며 말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
리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
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히 11:26). 그가 그렇게 물질을 초월하게 된 비결은, 히 11:26
의 말씀과 같이 ‘상 주심을 바라봄’이었다. 사람은 영원을 사모할 수 있고
또 그리해야 된다(전 3:11). 영원한 나라의 보화를 귀한 줄 아는 것이, 이 세
상 물질을 초월하는 비결이다.
2. 물질을 초월한 신자는 남들을 돕기 위하여 직무에 충성함
물질을 초월한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바로 앎으로 남을 돕기 위
하여 직업을 가진다. 이에 대하여는 사도 바울의 생활이 그 표본이라고 생각
된다. 그는 말하기를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
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
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
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4-35)라고 하였다. 신자는 남에게 주기
위하여 일해야 된다. 남을
도와 주기 위하여 사업하면, 그 일에 하나님의 축
복을 받아 성공하기도 쉽다.
주는 것이 복이 있는 이유는 (1) 남에게 주는 생활을 하는 자는 자기 속의 개
인주의를 죽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자는 그 사욕(私慾)으로써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한다. 사욕은 인격을 파괴시킨다. (2) 남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여
도와주는 생활은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는 것이므로 복을 받는다(마 22:39 참
조). (3) 남을 도와주는 자에게는 하늘에 보화가 있으므로 복되다(막
10:21). (4) 남에게 주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복
을 받는다. 신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구원을
받았으니(엡 1:3-6),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그의 최고의 목적이다. 신자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계속하기만 하면 그것은 그가 이적(異蹟)을 행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다. 감사는 이적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