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미친 행동 베드로후서 2장 15-16절
< 정창균 목사,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앞뒤 가리지 않고 억지 부리며 불법의 길 가는 것은 미친 행동”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성경에서나 역사에서나 언제나 두 종류의 도전에 직면하며 나아갑니다.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도전과 교회 안으로부터 오는 도전입니다.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는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대부분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도전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으로부터 오는 도전이었습니다. 사실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핍박을 비롯한 이런저런 위기상황들을 교회는 의외로 잘 이기며 극복해왔습니다.
치명적인 것은 교회 안으로부터 오는 위기였습니다. 교회 안으로부터 오는 치명적이며 대표적인 위기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거짓 선생 혹은 거짓 지도자들이 활개를 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두 번째 보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 문제를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운을 뗀 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으로 거짓 선생들의 행위의 본질과 그들이 처할 운명을 한 마디로 단언합니다(1절).
그리고는 교회 안의 거짓선생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행위들을 조목조목 길고도 자세하게 나열해나갑니다. 그러다가 사도는 구약의 선지자 발람을 들고 나와서 거짓선생들은 누구와 같은가를 실물로 생생하게 설명합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내고 있을 때의 선지자입니다. 민수기는 이 한 사람의 사건을 22-24장에 걸쳐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간단한 하나의 사건을 성경이 이렇게 길게 기록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튼 발람 사건의 내용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발람에게 복채와 함께 이 후의 큰 출세를 보장하면서 한 가지 요청을 보내왔습니다. 복채와 출세 보장의 댓가로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발람은 발락의 요구가 분명히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선지자로서 결코 해서도 안 되는 일임을 즉각적으로 분명히 알아챘으면서도 그 복채와 보장된 출세에 대한 미련에 사로잡혀서 발락의 요청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물리치지 않습니다. 얼핏 신앙적이어 보이는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우며 시간을 끌면서 그들을 붙잡아 두는 일을 반복합니다.
발람의 중심을 간파하신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하여 발람을 책망하시면서 까지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막으시고 오히려 발락왕의 요청과 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신 것이 이 사건의 요체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말씀을 한창 진행하다가 느닷없이 발람을 들고 나오는 것은 교회 안의 거짓선생들의 본질이 바로 발람과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거짓선생들과 발람을 이렇게 직접 연결시켜버립니다.
“그들(거짓선생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베후 2:15-16).
선지자 발람의 행동에 대한 사도의 평가는 한 마디로 미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친 행동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지자이면서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이 이런 미친 선지자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인 이유는 이들은 다 같이 복채와 출세, 곧 불의의 삯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것을 획득하는 것을 행동과 처신의 기준으로 삼고, 앞뒤 가리지 않고 억지를 부리며 그 불법의 길을 가려간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 단정은 지난 역사의 발람을 새삼스럽게 다시 비판하려는데 있지 않고, 오늘 날 교회 안에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을 책망하고 경고하려는 데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선생이 발람처럼 하는 것은 사도의 표현대로 하면 미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발람의 이야기를 광야에서 그 사건이 있은 이래 시대를 초월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여호수아, 느헤미야, 미가, 베드로후서, 유다서, 그리고 계시록에서도 발람 사건은 발람의 길을 가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는 암시는 분명합니다. 이 문제가 그만큼 치명적인 문제라는 의미일 것이고, 그러한 일은 시대와 상관없고 사람과 상관없이 언제라도 누구라도 쉽게 빠져들만한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할 위험성을 경계하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의 유명 혹은 무명한 지도자들이 받는 질타도,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연합단체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쏟아지는 질타도 바로 이런 문제일 것입니다. “불의의 삯”, 복채와 출세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 망하게 할 것을 은밀히 끌어들이는 것의 무서움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나귀도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선지자처럼, 예수를 모르는 세상과 불신자도 명백히 보면서 그리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라는 이들이 보지 못하고 오히려 나귀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선지자 발람처럼 계속 그 길을 갈 것을 고집하면서 억지를 부리며 버틴다면 그것은 분명 사도의 말처럼 교회 지도자의 ”미친 행동“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도의 단정처럼 교회 안의 거짓 선생이 될 것입니다.
거짓 선생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별개의 집단일 때도 있지만, 훨씬 더 흔하게는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이 어느 순간 거짓 선생으로 변절해버려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들이 두려워하며 정신을 차려야 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