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 콤플렉스
성주진 교수_합신 구약신학 교수
‘탕자의 비유’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
를 소재로 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죄인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
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탕자가 걸친 남루한 옷
은 아버지를 떠난 초라한 궁상을 대변하고, 그 위를 덮은 넓은 소맷자락은 아
버지의 가없는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적인 모습 때문인지 우리는 탕자를 은근히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
다. 탕자가 겪은 고생은 싫지만, 그가 보여준 극적 전환은 우리의 밋밋한 신
앙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이러한 ‘탕자 콤플렉스’는 ‘나이롱
신자’를 자처하는 교인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신앙인도 예외가 아닌 듯 합니
다. 어려서 믿은 이들 중에는 한 잔 걸치지 못하고 한 모금 빨아보지 못한
‘억울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박해자였지만 돌이킨 후에는 위대한 사도가 되어 주님을 위
해 자신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어거스틴도
방탕한 삶과 이교에서 극적인 회심
을 경험한 후에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신학은 그의 신학에
대한 주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극적인 회심의 이야
기도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일종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탕자와 같이 확실한 은혜를
체험하고자 하는 소원입니다. 확실한 변화와 무조건적인 용납을 사모하는 마
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형은 아버지와는 달리 동생을 극도로 미워하였
습니다. 탕자 콤플렉스는, 어느덧 동생이 아닌 형의 태도에 공감하는 우리의
바리새적인 율법주의를 허물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풍부한 경험과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
닙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신자, 말씀을 더 실감나게 전할 수 있는 설교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명제와 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감격,
더 절실한 체험의 이야기가 있을 때 더 풍요로운 삶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
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콤플렉스의 배후에는 낭만주의적 환상이 어른거리고 있습니
다. 소설이나 드라마의 극적 반전이라
는 이야기 구조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요. 탕자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극적
장면을 연출하기 위하여 집을 나간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실감
나게 느끼려고 한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는 돌아올 의사가 전혀 없이 아버지
의 품을 떠난 것입니다.
죄의 실존적인 모습을 외면하고 아름답게만 보는 것은 착각입니다. 죄는 낭만
이 아니라 영혼의 상실을 초래하는 소외입니다. 불신앙의 삶을 낭만으로 포장
하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쉽습니다. 잘못된 낭만주의는 악어와도 같습니다. 악
어는 몸을 물에 숨기고 조는 듯 눈을 감고 있다가 먹이감이 가까이 다가오면
전광석화같이 낚아채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탕자에 대한 부러움의 이면에는 은밀한 욕망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
도 탕자같이 한때나마 세상을 마음껏 즐겨보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이 욕망
은 더욱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드
러난 자기 안에는 숨겨진 자아가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욕망은 그림자처
럼 밖으로 드러난 인격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탕자 콤플렉
스에는 신학적인 오해도 곁들여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네가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
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을 오해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이자, 은혜의 오용이며 남용입니다. 더 큰 경험을 얻기 위하여 일부러 죄
를 짓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
다.
탕자 콤플렉스는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일깨워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신앙생
활이 영적 권태증으로 무기력해졌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부해져가
는 믿음을 극적인 현상으로 타파하겠다는 생각은 이해가 가지만, 일상적인 삶
과 통상적인 일에서 순종으로 영위하는 신앙생활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한 건 크게 하려는 심리를 버리고 날마다 작은 간증을 쌓아가는 삶을 가꾸어
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