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
성주진교수/ 합신 구약신학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견해들이 충
돌하는 일이 잦아지고, 다루기 어려운 예민한 문제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치 분야에서도 지난 총선의 결과가 보여주듯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습니
다. 대립과 갈등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상생’의 길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나
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먼저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할 점은 복잡한 사회
적 이슈에서 물러나 사적인 영역에만 몰두하려는 유혹을 물리치는 일입니다.
기독교 경건은 종교적 취향이 맞는 동호인들끼리 나누는 폐쇄적인 친교가 아
니라, 공론의 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제시하고 적용하며 공적인 영역
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중요한 것은 대립이 심화되는 영역에
서 이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주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소위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을 참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
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와 태도를 통
하여 해결하려는 운동은 많은 문제점과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예를 들어 인종, 남여, 장애인 그리고
정치의 문제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요청되는 자
세일 것입니다.
단일민족임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태도
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연구결과들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
이 나아졌지만, 내심 백색 피부의 서구인을 선망하고, 검은 피부를 가졌거나
가난한 외국인을 부적절한 말로 무시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
을 내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하게도 인종의 다양성을 기뻐하
고 배타적 응집력을 열린 포용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신학적 자원을 가지
고 있습니다.
남녀의 문제는 성경번역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개역성경의 ‘형제’는 많은 경
우 ‘자매’를 내포합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이러한 경우에 ‘형제자매’로 번역
함으로써 현대의 세분화되고 엄정해진 단어의 쓰임을 고려하고 여성
의 소외감
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성들도 예컨대 ‘시온의 딸’이라는 표현을 읽
을 때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방향은 그냥 ‘형제’로 번
역한 후 자매도 포함된다고 설명하는 전통에 대한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습
니다.
장애인에 관련된 새로운 번역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불구자’를 ‘지
체장애인’으로, ‘맹인’을 ‘시각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은 이미 우리 사회가 선
택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취급을 그대로
드러내고 주님이 베푸신 큰 사랑을 대조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불구자’ 등
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입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쓰이
지 않는 용어를 당사자들의 거부감을 무릅쓰고 사용하는 것은 메시지 수용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을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과
거에는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그
렇게 몰기 위하여 사건을 조작한 경우도
있습니다. ‘색깔론’이 힘을 잃어가
는 지금은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수구골통’이라
고 부르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해서는 합리적인 논의와 사회적 통합을 기대할 수 없습니
다. 견해가 다르더라도 사람을 인정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믿는 그리
스도인의 축복입니다.
교회는 세계의 다양성을 골칫거리가 아니라 창조와 구속의 부요함을 배우고
누리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못
지않게 다양하고 적대적인 사회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일구어냈습니
다. 좋든 싫든 소위 선진국들의 다양한 사조와 상호대립이 우리나라에서도 재
현되리라고 예측되는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열린 마음과 공정한 판단, 그리고 이해하려는 태도로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대할 때 진리의 실천과 전파는 더욱 힘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