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진칼럼> 부활절 삼상(三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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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진칼럼>

부활절 삼상(三想) 

성주진 교수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부활의 의미를 묵상하다가 세 가지 상념을 떠올립니
다. 이 생각들은 나름대로 부활의 은혜를 새롭게 살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생각은 예수님을 처음 영접했던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
느 수양관 잔디밭, 일단의 학생들이 차례대로 앞으로 나가서 장차 자신이 덧
입을 부활의 몸에 대하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키 큰 미남으로 부활했
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쁜 얼굴로 부활할 줄로 믿습니다.’ 듣고 있던 이
들도 함께 웃으며 즐거워했습니다. 물론 성경은 그렇게 되리라고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 회상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받으
신 상처는 그냥 남아 있습니다. 손과 발에는 못 자국이, 그리고 그의 허리에
는 창 자국이 선명합니다.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확신을 주었던 그 사랑의 상
처들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려니 생각하니 주님의 부활에 담긴 사랑
에 다
시 한번 감격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구
나…. 내 죄 때문에 생긴 그 보기 싫은 상처들을 영광스러운 훈장처럼 지니
고 계시다니….’

두 번째 생각은 ‘빈 무덤’으로 향합니다. ‘기독교는 무덤 없는 종교’라는 말
이 있습니다. 공자와 석가모니, 마호멧 같은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다 죽
어 무덤에 묻혔지만, 그리스도만은 무덤을 깨치고 살아나셨으므로 무덤이 없
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기독교에도 무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빈 무덤’입니다! 

‘무덤이 없다’는 말과 ‘빈 무덤이 있다’는 말은 주님의 부활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무덤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이 죽음을 맛보지 않
고 직접 승천하셨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주님의 부활이 없는 때
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진리의 문제입
니다.

나아가서 이 표현은 죽음 없는 부활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습
니다
. 반면 ‘빈 무덤’은 죽음 없는 부활이 불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십
자가 없는 부활을 구하지만 부활의 은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통과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를 없이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서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그 무엇입니다. 십자가만이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
다.

마지막 생각은 ‘능력이 없다’는 말에 미칩니다.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힘입
어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합
니다. 그러나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부활의 능력을 이미 ‘소유하고’ 있
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연합의 신비는 우
리로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주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
신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됩니다. 주님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신 그대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남은 것은 우리가 그 능력을 활용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은 다양한 능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 바람, 태양, 원자 등 우
리가 아는 힘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에너지가 이 경이로운 우주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각양 에너지가 넘쳐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거나, 활용방법을 모르거나, 또는 알고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력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무한한 능력을 이미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소유한 부활능력을 ‘사
용’하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없는 능력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이미 
주어진 능력을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
과 복음을 나누고, 종교와 기독교를 가르는 차이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도 바울처럼 어찌하든지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는 현재의 신앙
상태에 적당히 주저앉지 말고 ‘거룩한 충만’을 추구하는 자리로 나아오라고 
우리 모두를 초청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