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
성주진 교수/합신 구약신학
나뭇잎을 다 떨궈버린 앙상한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아낌없이 주는 나
무’를 생각해 봅니다. 한 나무가 한 소년을 사랑했습니다. 소년도 나무를 사
랑했습니다. 마냥 좋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소년은 더 이상 나무 곁에
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소년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나무는 소년이 돈
을 원하면 돈이 될 사과를 주고, 집을 원하면 집을 지을 가지를 주고, 배를
원하면 배를 건조할 나무 기둥을 주었습니다. 소년이 노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에도 나무는 더 이상 줄 것이 없음을 미안해하면서 소년이 앉아서 쉴 수 있
도록 마지막 남은 밑동을 제공합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소년에 대한 나무의 사랑에는 모성적 특성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적 몰입은 남을 세워주고 채워주려는 아름답고 복된 삶의 특징입
니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
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특별
히 애정과 안전의 보장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낌없이 주
는 나무’의 환대와 희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
나님은 멀리 떠나간 아들이 삶에 지치고 피곤해서 돌아올 때마다 한결같은 사
랑으로 맞아주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른 각도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소년이 나무를 사랑한 것
은 사실입니다. 나무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
속해서 나무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의 사랑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에도 여전히 미성숙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저 어려울 때 찾아와서
는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정도였습니다. 나무의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
다.
그렇다면 나무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나무는 소년을 늘 ‘얘야’라고 불렀습
니다. 그리고는 소년에게 늘 ‘놀자’고 청했습니다. 소년이 유년기, 청소년
기, 장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거치며 급격하게 변화하는데도 나무는 소년을
여전히 어린이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함께 놀아주고 원하는 것을 희생
적으로
주는 것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외형적 일관성 뒤에는
아이의 변화와 필요에 대한 무감각이 숨겨져 있습니다. 어릴 때 먹고 놀고 사
랑 받고 공급받는 것은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꼭 필요한 경험이지만, 나무는
소년의 감정, 도회지의 삶과 돈과 야망과 욕구, 그리고 안정과 쉼과 안식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무는 소년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나무의 소년에 대한 시선은 소년과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시기에 소년을 독
립적인 존재로 내보내지 못했습니다.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상대방이 진정으
로 필요로 하는 것과 다를 때 사랑은 이처럼 서로 엇갈리게 됩니다.
이렇게 교감이 없는 상황에서 나무는 소년에게 주는 것만으로 정말 행복했을
까요? ‘나무는 그저 행복했었지만… 정말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는 말에
는 나무의 비애가 배어 있습니다. 더 이상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감정에
는 자기자신에 대한 연민이 엿보입니다. 이 글이 ‘자기중심적인 어머니들에
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때
로는 아낌없
이 주는 것보다 절제된 사랑이 소년의 성장을 위해 더 유익한 것입니다.
진정한 자녀 사랑은 무조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적절한 것, 더 좋
은 것, 즉 자립과 독립심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자녀가 행복함으로써 행복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줌으로써 행복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자
기도취적인 만족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자녀가 가장 필요로 하
는 것은 아낌없이 받는 것보다 성숙으로 이끄는 사랑의 교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인 읽기처럼 한결같은 태도로 우리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어머니 같은 존재는 정말 존귀합니다. 어린 시절에 무조건적 사랑을
경험해보지 않는 사람은 평생 자존감과 정체성의 확립에 곤란을 겪기 일쑤입
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품에서 근원적인 안식과 고향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소년에게 주느라 다 잘려져 나간 나무의 그루터기에 다시 자라나는 조그만 새
싹을 하나 그려 넣고 싶습니다. 자기 희생적 사랑이 새로운 탄생의 풍성함을
약속하는 성경적 원리를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