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어…_ 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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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어…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참된 기독교는 명분적 윤리에서 벗어나 이해와 용서와 사랑 실천해야”

 

 

지난여름은 너무나도 무덥고 흥분되는 시간들로 가득 찼다. 폭염과 열대야에 지칠 때면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의 시구를 떠올리며 ‘농사에 제격이다’를 생각했고, 더위에 힘들어 지칠 때면 런던의 승전보와 함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나보다’를 읊조렸다.

분노에 찬 기습폭우로 벌써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꿈같았던 어느 여름날들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이렇듯 자연에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는 것이 감사하기만 하다.

 

작금 우리사회와 나라, 교회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된다. 복음은 개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백성을 위한 것임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더 들게 된다.

 

죄는 우리를 갈기갈기 찢고 분리시키며 고립된 상태로 만들지만, 복음은 우리를 회복시키고 하나 되게 하며 공동체에 속하게 한다. 성경이 지향하는 신앙생활은 개인적 차원을 상당히 내포하지만 고립된 개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개개인의 주변에는 항상 가족, 종족, 나라 곧 교회가 있다. 유진 피터슨의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을 조금 요약해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동시에 동산에 홀로 있는 경우가 아니라,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가운데 있을 때, 계시되고 체험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모든 계시가 그러하다. 복음은 우리를 공동체로 이끄는 것이다. 사생활 주의와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성향은 복음을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에 주목하는 것은 언제나 공동체적 행위이지 사적인 행습이 아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신앙생활의 맥락인 것이다.’

 

사랑은 역시 고립된 채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타인과 동떨어질 때 자만심으로 변한다. 따라서 은혜는 홀로 받을 수 없다. 타인으로부터 단절될 경우 그것은 탐욕으로 변한다. 그리고 소망은 외로이 자랄 수 없다. 공동체로부터 떨어질 경우 그것은 공상의 씨앗을 뿌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은사, 그 어떤 미덕도 신앙공동체를 떠나서는 건강하게 개발되고 유지될 수 없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말은 거만한 교권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일상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영적인 상식이다. 이것을 무시한 채 살려는 사람은 평생 메마르고 빈곤한 삶을 면할 수가 없게 된다.

 

이 원칙에 승복하는 자는 풍성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날마다 우리에게 강요되는 이기적인 사생활을 희생하면 몸된 삶이 지향하는바 진정한 신앙성숙을 백배나 날마다 보상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은밀한 개인주의적인 믿음이라는 따분한 순례자와 굳이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한결같이 우리의 개인주의와 사생활주의에 도전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같이 하지 말라. 짊을 서로 지라는 등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교회에서 완전한 자기를 추구하는 경향들이 있다. 목회자는 신자들에게 말 잘 듣는 병사가 되기를 요구한다. 신자는 무슨 일이 있으면 자연인의 본성에 따라 혼자 기도원을 가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는 기독교를 윤리 위에 놓고 출발했다. 신앙의 핵심이 명분적 윤리로 갔다. 그래서 사실은 율법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그 후유증으로 후세대들이 아무리 성경을 봐도 그게 아닌데 하면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신앙을 정성과 치성으로 만들어갔다. 신앙은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밖에 없었다. 그나마 자신의 윤리도 잘 지키지 못하면서 누구를 정죄하고 비판하기에 바빴다. 결국 기독교를 윤리, 도덕, 법으로만 가지고 가서 정직만을 강요했다. 윤리, 도덕, 법은 하나님이 도덕적 성품을 가지셨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다.

 

정직과 윤리, 법 위에 이해와 용서와 사랑이 인격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법을 관계로만 붙잡지 말고 풍성하게 드러내는데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동안 선배들이 신앙을 사명으로만 바라봤다면 이제 우리는 신앙을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

 

오늘도 우리는 성경이 무엇이 말하는가를 고민하면서 내가 만난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될 줄로 믿는다. 어느 날, 훌륭해져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임무, 교훈이 아니라 한 사람을 키워나가는 훈련소다. 교회가 윤리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명령법이 많았다.

 

지상의 교회는 진짜 교회인지, 가짜교회인지 모른다. 교회는 이래야만 된다고 하는 것이 없는데 부흥해야 한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교회에는 시행착오가 많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시기 때문에 어느 한두 가지를 가지고 속단하거나 분을 내어서는 안 된다.

 

박영선 목사님은, “영성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사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은 종교성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은 자기가 자신 있어 하는 것은 언제나 사고를 치게 되어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은 골짜기, 어두움 속에서 오늘도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나 기다리며 믿음을 가지고 화내지 말고 자폭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안 되어도 좋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는 잘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래야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거기서 만약에 일이 잘 되면 “어, 이것 봐라!”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가 서 있는 그 장소와 위치에서 캄캄한 밤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맡은 직분과 공동체와 지역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어디서나 통하는 그리스도인의 부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