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석포교회 잔칫날_김영자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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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포교회 잔칫날

 

<김영자 사모, 채석포교회>

 

“동네에서 처음으로 장로님 배출되어 더 뜻깊은 잔치돼”

 

 

여느 계절답지 않게 따뜻한 11월의 셋째 토요일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농사를 지어 하루 세끼 쌀밥 먹고사는 사람들이 잘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어촌에서는 농사짓는 사람들의 농산물과 생선을 교환하면서 생활했습니다. 국민들의 식생활이 개선되면서 생선 값이 오르고 어촌의 경제생활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어촌의 모습도 많이 변했습니다.

 

요즘의 시골 풍경은 추수를 끝내고 짚더미를 말아놓은 하얀 큰 뭉치가 논에 줄지어 서 있고, 김장을 하기 위해 배추와 무를 뽑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휴가철이 아니면서 고속도로가 소통되지 않고 막히는 때는 가을 김장철과 봄에 농작물을 수확할 때입니다. 도시에 거주하는 자녀들이 농촌의 부모님 집에 와서 김장을 함께 하고 추수한 여러 가지 농작물을 사랑의 선물로 받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곳에 있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채석포교회에 잔치가 있습니다. 한 분의 장로님과 세 분의 권사님이 탄생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잔칫날이 있을 토요일의 일기 예보를 보니 약간 흐리며 비가 온다고 해서 걱정은 되었지만 교회 행사를 할 때쯤에는 항상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좋은 날씨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채석포교회는 23년 전 가난하고 황폐한 영적인 불모지였던 채석포의 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가 태동하였습니다. 그 가정의 부부는 작은 배를 가지고 함께 고기를 잡으면서 생활을 하였으나 남편은 항상 술에 취해 있어 아내와 자녀들을 괴롭히며 하루하루를 목표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주일날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가정에 가면 아침부터 일찌감치 술에 취한 여성도의 남편은 새우등을 하며 아랫목에 이미 자리를 잡고 코를 골며 자고 있어 불땀이 없는 윗목에서 예배를 드릴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정의 부부가 장로와 권사로 취임하여 이제는 교회의 기둥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직장인들이 주일을 성수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어촌에서 주일 성수하는 것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바다에서는 그 날의 날씨와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에 맞추어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주일 성수하는 것에 자기 희생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어려움을 이기고 이 가정은 예수님을 믿기로 한 그 날부터 주일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할 때는 옛 술친구들을 만날 것 같아 산길로 숨어 다녔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날부터 술은 입에 대지 않고, 교회에 나가는 날이면 낮이나 밤이나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다녔습니다.

 

남편은 열심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교회가 작고, 성도 수가 적다하여 장로로, 권사로 추대되지 않는 것을 항상 마음으로 아파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장로 한 분과 권사 세 분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뿐 아니라 채석포 동네에서도 장로가 처음으로 배출되었습니다.

 

잔칫날은 흐린 날씨였지만 바람이 몹시 불었기 때문에 배가 출항하지 못해서인지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과거에 술꾼이었던 남편이 장로로 임직하고 아내도 권사로 취임하면서 회한과 기쁨의 눈물로 자녀들과 성도들, 그리고 이웃들을 울게 만든 축하의 시간이었습니다.

 

또 새로 취임하는 어떤 권사님은, 어릴 때부터 무속인인 어머니의 굿거리할 물건들을 챙겨 주는 것도 서러운데 무당의 딸이라고 놀림 당했던 지난날들을 파노라마처럼 회상하면서 하나님 때문에 그 서러움조차 기쁨의 눈물이 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 모두가 감사뿐인 날이었습니다.

 

금년 들어 교회 상황은 슬픈 날들이 많았습니다. 연로하신 분들이 노환으로 말미암아 교회 참석을 못하는 분들도 계셨고, 요양원으로 가신 어느 여집사님은 주일마다 얼굴을 보며 위로의 말을 주고받았는데 지난 주일에는 치매가 더욱 심해져서 저의 얼굴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멀거니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슬펐습니다.

 

어느 때는 어르신들과 생활하다보니 우리들 자신도 동화되어 같이 늙어 가는 것 같아 마음조차 우울할 때도 있었습니다. 성도들도 나이 들고 우리 또한 나이 들어가면서 교회의 앞날이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 기도를 마치고 온 남편은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인들만 있는 농촌교회의 미래가 걱정되지만 그들의 자녀들이 청년의 때를 지나고 언젠가 중년이나 장년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어릴 때 그들이 다녔던 교회를 다니면서 아버지,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나가며 고향과 교회를 지킬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장로님이 되고, 권사님이 되어 첫 추수감사예배 준비를 하면서 장로, 권사의 호칭이 아직은 어색하지만 “장로님! 권사님!” 하며 불러보는 성도들 모두가 기쁨을 함께 누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회색빛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고 교회 부엌에서는 김장을 준비하는 권사님들의 웃음소리에서 채석포교회의 꿈과 희망의 미래를 보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