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의 목회편지(77) 딤전 4:8b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나는 성도들과 상담하면서 내용의 폭이 매우 크다는 것을 발견한다. 심지어
는 나의 상담은 이 사람과 말할 때와 저 사람과 말할 때 극심한 모순을 일으
키기도 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먹고사는 일에 매달린 성도와 상담할 때
면 현실 세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믿음의 조상들이 바라보았던 내생을 바
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면에 세상을 한탄하여 집안일과 직장 일을 때
려 치고 여러 기도원으로 전전긍긍하면서 주님의 재림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와 상담할 때면 빨리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 모순
을 느끼다가도 이 모순이야말로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확신한다.
현실과 이상의 모순 느껴
사도 바울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할 때 두 종류의 철학자들
을 만났다(행 17:18). 사실 한 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벅차지만 스토아 철학자
들은 이상세계를 사모하는 사람들이었고,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현실세계
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사상들은 이데아(이상)를
추구하는 플라톤의 정신과 우시아(현실)를 부르짖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
과 관련이 없지 않다. 고래로 사람들은 현실과 내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이 세상에 목매는 현실주의자
와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는 내세주의자라는 두 종류로 압축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새로운 길을 갔다. 사도 바울은 경건의 유익을 언급한
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8절). 경건
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을 주는 육체의 연습과 달리 범사에 유익하다. 사도
바울이 ‘범사’라는 말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시간
적인 범위이다. ‘범사’는 경건의 유익이 포괄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래서
‘범사’라는 말을 바로 이어서 금생과 내생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경
건은 현실에만 약속을 줄 뿐 아니라 내세에도 약속을 준다. 경건은 현실적
인 약속과 내세적인 약속의 기반이다.
경건은 현실과 내세를 위한 것
경건은 금생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경건은 현실 생활에 유익을 준다. 경건
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진다. 그는 아주 작은 일에도 기
쁨을 얻는다. 경건한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한다. 그래
서 그는 이 세상에서 매우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삶을 영위한다. 또한 경건
은 내생을 위한 약속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는 하나님의 나
라에 들어간다. 그는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다. 경건한 신자는 천국에서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맛본다.
경건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도 바울의 시야에는 금생과 내생이 한꺼번
에 들어온다. 그의 눈은 금생에 가려 내생을 보지 못하거나, 내생에 가려 금
생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연습이 약간의 유익을 주는 것과 달
리 경건의 연습은 금생과 내생을 위한 약속을 허락하는 유익이 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건을 연습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에 있다. 사실상 이 권면은 디모데뿐 아니라 온 세상의 신자들이, 그리고 오
고 오는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미쁘다
이 말이
여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하도다”(9절).
미래는 현실의 연속선상에 있어
사도 바울은 단지 현실주의자도 아니고 종말론자도 아니다. 그는 현실과 내
세를 다같이 수긍한다. 그에게는 금생과 내생이 다같이 중요하다. 그는 금생
을 위해서 내생을 내버리지 않으며 내생을 위해서 금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금생을 중시하기 때문에 내생도 중시하며 내생을 중시하기 때문
에 금생도 중시한다. 그래서 그는 자주 “살든지 죽든지”라는 표현을 사용
했다.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육체를 가지고
성도들과 함께 있는 것도 귀한 일이다.
사도 바울이 전한 기독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철학의 세계와 다른 길을 가
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몸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기독교는 스토
아 철학자들과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 보기에도 새로운 종교임에 틀림없었다
(행 17: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