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교수/합신
이런 말이 매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목회자들은 동역자를 찾을
때 믿음이 좋은 사람보다는 마음이 착한 사람을 원한다. 얼마 전에도 목회를
잘하고 있는 친구가 쓸만한 부교역자를 한 명 추천해달라며 전화를 했다. 그
래도 어느 정도 구색이 맞는 사람을 소개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조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한참을 빙빙 둘러대며 이런 저런 조건들을 내걸더니 결국 말미에 이렇
게 토를 달았다. “뭐,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보다는 마음
이 착한 사람이야 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이유를 되묻는 나에
게 그는 정말 그럴 듯한 말로 대답을 하였다. “믿음은 말이야, 언제든지 좋아
질 수 있지만, 마음은 믿음이 좋아져도 착해지지 않더라구.”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친구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이해하는 것이 별
로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군이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n있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깨끗한 양심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
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믿음의 비밀과 깨끗한 양심은 서로 나란히
놓이는 병치의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비밀이 깨끗한 양심 안에 놓이는 포함
의 관계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깨끗한 양심 안
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이것은 교회의 일군에게는 믿음의 비밀보다 깨끗
한 양심이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깨끗한 양심이 있고 그 다음에야 믿음
의 비밀이 있다. 그래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믿음의 비밀
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
게도 우리의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다.
교회가 어지러운 것은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믿음 좋은 사람들이야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가! 내로라 하는 믿음을 가진 사
람들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도 많이 알고 기도도 잘하
며, 입술에는 말끝마다 아멘 할렐루야가 넘쳐흐른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어지럽다. 교회가 어지러운 까닭
은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
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서 더러운 것을 멀리하며 불결한 것을 싫어하
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는 안정되며,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서 겉보다
속을 가꾸고 외면보다 내면을 장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는 안전하다. 그러
므로 우리는 이쯤에서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
하여 경계의 목적을 분명하게 정했던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경계
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
늘”(딤전 1:5).
깨끗한 양심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채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
는 것은 거짓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힘주어 말했던 야고보의 말을 슬쩍 패러디하자면 양심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
가 죽은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는 야고보의 말이 조금도 빗나
감이 없는 사실인 것처럼(약 2:20) 양심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는 말도 한
치의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것이 영혼과 몸을 분리시키는 것
과 같은 어리석
은 짓이듯이(약 2:16) 양심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것도 목숨과 육체를 떼어
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믿음은 반드시 양심과 함께 일해야 하며,
양심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어야 한다.
이제 다시 바울의 생각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믿음은 반드시 양심 안에서
작용해야 한다. 깨끗한 양심이 선행되지 않은 훌륭한 믿음이란 것은 이미 거
짓이며 해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비밀을 구하기 전에 먼저
깨끗한 양심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바나바를 소개하면서 “착한 사람이요 성
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행 11:24)라고 믿음보다 성품을 앞세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동역자를 구하기 위해서 믿음이 좋은 사람보다 마음이 착한 사람을 찾
는 목회자의 심정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님을 거듭거듭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