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길 (딤전 2:15)
하와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모든 여자는 하와의 딸인데, 하와의 길
이 모든 여자에게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이 인류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면, 하와의 타락은 여자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
이 죽은 것같이, 하와 안에서 모든 여자가 죽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와
는 저주를 받았고, 하와 안에서 모든 여자가 저주를 받았다. 하와에게 주어
진 저주는 해산의 고통이었다 (창 3:16). 그래서 모든 여자는 자녀를 낳으려
할 때 해산의 고통을 맛보게 된다. 이렇게 타락의 문맥에서 쉽게 알 수 있듯
이 고통이 동반되는 해산은 본래 저주 그 자체였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여자에게는 고통스런 해산이 더 이상 저주가 아니다.
믿는 여자도 자녀를 얻으려고 할 때 해산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해산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 믿는 여자는 비
록 해산의 과정을 거친다 할지라도 구
원에 이르게 된다. 믿음의 조건 하에서
해산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
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리라” (딤전
2:15)고 말했을 때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러나”를 사용하여 전에는 하와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져 고통스런 해산의 저
주를 받았지만 이제는 여자들이 믿음 안에서 구원을 얻는데 심지어 해산까지
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역전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을 문법적으로 살펴볼 때, “그들이 (여자들이) 구원을 얻으리
라”는 문장이 한편으로는 “그 해산함으로써”라는 구문에 의하여 수식되고 다
른 한편으로는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이라는 구문
에 의하여 수식되는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이 (여자들이) 그 해산함으
로써 구원을 얻으리라”는 문장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
하면”이라는 구문에 의하여 수식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하
자면 “만일 … 에 거하면” 구문은 “그 해산
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리라”는 문
장을 전체적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은 여자들이 구원
을 얻기 위한 두 가지 조건 (“그 해산함으로써”와 “만일 … 거하면”)을 말하
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여자들이 구원을 얻는 조건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만일 … 거하면”). 여자들을 위한 구원의 조건은 믿음과 사랑
과 거룩함에 거하는 것 밖에는 없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비
록 모든 여자에게 하와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해산의 과정이 여전히 남아있
다 할지라도 믿음 안에 거하면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상 해산의 과정은 자녀를 낳으려는 모든 여자에게 필연적인 일이다. 그
러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해산이라는 과정은 여자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저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여자는 심지어 해산의 과
정을 통한다 할지라도 구원에 이른다. 해산은 더 이상 여자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타락의 상태에서는 해산의 과정이 여자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이 전부이지만, 믿음의 조건에서는 여자들이 (여전히 고통스럽
기
는 하지만) 해산의 과정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하는 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전에는 유혹과 범죄와 타락에 빠진 여자에게 저주로 작용하던
해산이 이제는 믿음과 사랑과 성결을 지닌 여자가 구원을 얻는데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본문은 여자가 해산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된다. 타락과 관련하여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해산은 구원과 관련
하여 중립적으로 이해된다. 해산은 자녀를 얻으려는 모든 여자에게 필연적인
것으로서 타락의 상태에서는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심판의 표식이지만 믿음의
상태에서는 구원의 길에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는 것이 되었다.
하와의 길은 아직도 멀리 남아있다. 하와는 모든 여자의 어미인데, 모든 여
자가 하와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 믿는 여자에게는 하와의
길이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