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합신 신약신학)
나는 어릴 때부터 별로 싸워본 적이 없다. 괜히 누가 시비라도 걸면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슬슬 피해버리는 겁쟁이였다. 지금도 누구하고 말싸움이라도
할 모양이면 벌써 간이 콩알만해지고 목소리가 모기소리만큼 줄어들고 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어린아이였을 때 싸움대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적이
있다.
어느 날 또래친구로서 동네에서 정말 싸움대장으로 이름난 중봉이와 시비가
붙어 서로 부둥켜안고 언덕 아래로 구르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다 손을 뻗친
것이 정확하게 그 녀석의 콧등에 맞아 코피를 쏟게 만들었다. 그때 주위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나를 대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생각만 해
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가만히 되돌아보면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싸움이었다. 비록 욕질하
고 주먹질하며 싸우지는 않았지만 고비마다 단락마다 숨이 멈추고 간이 떨어
질 정도로 어려운 일들이 많았
다. 하지만 나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어도 사도 바울의 인생만큼 처절한 싸움이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존전에 서기까지 사도 바울의 인생은
형언할 수 없는 싸움 속에 있었다. 사도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았던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와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섰을 때 다시는 지
나간 세월의 싸움을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시점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선한 싸움을 하였다 (딤후 4:7).
이런 차원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한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사도 바울의 인생이 싸움이었듯이 디모데의 인생도 싸움일 수밖
에 없고 그처럼 우리의 인생도 싸움일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이 싸워야 했듯
이 디모데도 싸워야 하며 그렇게 우리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것이 무슨 싸움이냐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선한 싸움”이라고 불렀다. 이 “선한”이라는 한 마디의
작은 수식어 속에는 엄청난 내용이 함유되어
있다 (디모데전서에만 이 단어
가 자그마치 16번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하라).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그것은 세상사람의 추구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을 지시하며, 하나님의 요구와
는 질적으로 같은 것을 의미한다. 선한 싸움이란 세상사람은 내심 멀리하지
만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권면하면서 아울러 방법도
제시하였다. 그것은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가진다.
첫째로 선한 싸움은 예언을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 언급된 예언이 신
비적인 성령은사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직분적인 성경해설을 가리키는지 분명
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영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이
다. 선한 싸움은 물질적인 것이나 육체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것과 관련된 것
이 아니다. 선한 싸움은 영적인 것이다. 물질이든 육체든 세상이든 무엇이나
하나님을 위한 일에 관련되면 그것은 이미 영적인 일이 된다.
둘째로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도구로 삼아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
과의 관계이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
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자가 선한 싸움을 싸운다. 양심은 사람과 관련
된다. 양심은 사람 앞에 서는 것이다.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보
기에 정직한 자가 선한 싸움을 싸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지 않은 자나
사람이 보기에 정직하지 않은 자는 선한 싸움을 할 수가 없다.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믿음과 양심이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믿음과 양심
가운데 어느 한 가지든지 결여되면 선한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모든 인생은 싸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선한 싸움이다. 사도
바울처럼 디모데가 선한 싸움을 싸웠듯이, 디모데처럼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
워야 한다. 나는 지금 다시 한번 굳게 결심한다. 어릴 적부터 싸움이라면 지
레 겁을 먹고 도망하던 사람이지만 이 선한 싸움만큼은 용기를 내서 참여하리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