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 교수의 현대신학해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2)
우리가 이 전호에서 모든 진리는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해답을 얻게 되고 진
실성이 밝혀진다는 판넨베르크의 주장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는 현 삶에
혹은 자연 속에서 절대적 기준이나 법을 성취할 수 없고 어떤 이론적 확실성
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그의 주장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
님에 대한 믿음이 현 제한된 세상과 실재를 더 확실한 방향으로, 즉 미래적으
로 이끈다고 주장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
라 합리적 증명에 맞추어 진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야기했다.
이러한 미래적 세계가 인간의 합리적 증명과 연결된다는 신념 하에 판넨베르
크는 그의 신학을 펼친 것이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인간, 교회 모든 신
학적 잇슈들을 그 신념을 가지고 펼쳐나간다. 그는 하나님을 역사의 ‘마지
막'(eschaton)과 동일시한다. 공간적으로 말하면 ‘전체’가 하나님 자
신이
면 ‘부분’은 하나님의 표출이요 인간 역사인 것이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마
지막’이 하나님이요, ‘현재적 미완성’은 인간 세계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 그
리스도는 다름 아닌 그러한 ‘전체’ 혹은 ‘마지막’의 예기적(proleptic) 존재
혹은 상징일 뿐이다. 그리고 성령은 그런 종말론적 하나님의 인간 세계를 향
한 영향력 내지는 그 하나님의 활동의 장(場)에 불과하다.
사실 우리가 판넨베르크의 글들을 읽노라면 우리의 신학과 비슷하게 들리는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그의 신학적 틀을 모르는 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아무리 말이 같고 설명이 같아 보여도 실재
적 의미가 다른 경우는 우리가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과 같이 몇 가지로 그의 신학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도록 하자.
판넨베르크는 사실의 진리성을 역사의 과정을 통한 이성적 관찰을 통해 증명
된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중립적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
나 그러한 이성적 관찰이나 증거가 어떻게 중립적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다. 결국 인간 개인의 자율적 판단에
의해 좌우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리
고 역사의 종말이 오기까지는 우리가 가진 지식은 부분적이고 예비적
(provisional)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적 진리는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지식이 부분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불확실한 것
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을 모든 존재론적, 지식론적 근거로 삼고 해결하려는 판넨
베르크의 사고의 틀은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가깝게
는 몰트만과 비슷하다. 또한 바르트의 실존주의적 틀이나 판넨베르크의 미래
중심적 역사의 틀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면 둘 다 인간의 자율성에서 투
영(projection)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의 부활 개념을 예를
들어 어떻게 그가 인간의 자율성을 주장하는지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부활을 마지막 날(eschaton)과 연결시켜 마치 부활을 역사적 사
건으로 본다. 그러나 이 말은 정말 부활이 역사적으로 발생되었는지 아닌지
모른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말하는 부활의 역사성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과거에 발
생된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라
마지막 날과 연결되는 사건이다. 부활이 마지막 날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그 부활의 사건을 역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님
의 부활 개념은 우리의 구속(redemption)과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비록 마지
막 때(eschaton)에 그 부활의 능력 혹은 효과가 주어진다고 하지만 그 마지
막 때는 우리에게 알려진 영역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께도 ‘아직은’
알려진 영역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영역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실재적
으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해 줄뿐이다.
사실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적 사고 틀은 칸트가 역사와 자연 세계인 현상적 세
계를 위해 그리고 인간의 자율성 확보를 위해 본체론적(noumenal) 세계를 만
들었던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그리고 칸트 철학의 약점을 보완
하기 위해 인간 역사 속에 돌입되고 모든 인간의 부분적인 것과 미완성적인
것의 원체(原體)가 되는 헤겔의 ‘절대적 정신'(Geist)과는 거의 같은 사고의
틀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 정신’도 우리에게 모르는 세계나 다
를 바 없
다. 그 이유는 진리라는 것은 사실 ‘전체적’이어야 하고 ‘알려진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부분적이고 미완성적인 것을 아직 진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체’가 그리고 그 ‘완성’이
현재적이어야 한다. 즉 미래적이거나 종말론적인 것은 우리에게 실재로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가르치는 종말론적 신앙은 언뜻 부분적이고 미완성적으로 보이
지만 이미 과거에 발생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근거한 신앙이기 때
문에 그리고 그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현재 우리에게 완성된 진리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분명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날과 연결된다. 그러나 판넨
베르크가 주장하듯이 마지막 날에 그 부활의 역사성 혹은 진리성이 밝혀지는
의미로서의 연결이 아니라 바로 과거 발생된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의 능력이
성도들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연결인 것이다.
또 한가지 지적할 것은 판난베르크는 마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듯이 하나
님의 존재적 근거를 미래에 두었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미래에
의존케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하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와 같
이 존재하는 범신론적 하나님 아니면 미래가 속해 있는 시간에 갇혀진 존재
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사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부인
하는 것이요 그의 神格(person)을 부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