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몰트만 (2)

0
62

정승원교수의 현대신학 해설

위르겐 몰트만 (2)

지난 호에 우리는 몰트만의 신학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번호에서
는 간단하나마 그의 신학을 분석 비판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그의 신학은 철
저한 변증법적(dialectical) 신학이다. 그가 말하는 미래 혹은 약속은 바로 
칸트가 말하는 본체론적 세계나 바르트가 말하는 전적 타자로서의 초월적 하
나님과 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역사속에 비쳐지는, 즉 미래의 약속이 가능
성으로 현재에 다가오는 희망은 칸트가 말하는 현상적 세계나 바르트가 말하
는 역사속에 내재하는 혹은 계시속에 나타난 하나님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이
러한 초월적-내재적 변증법은 바르트의 계시 개념과 거의 같다고 하겠다. 물
론 바르트와는 달리 몰트만은 역사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 
역동성 역시 변증법적 틀안에서의 모습이다. 이런 차원에서 몰트만은 칸트와 
헤겔을 종합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결코 미래의 하나님이 현재 역사속에 현
존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는 멀게는 칸트, 가
깝게는 바르트에서 답습했다 하겠
고, 미래(혹은 종말)와 현재가 역사라는 존재의 틀속에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
된다는 생각은 헤겔에서 왔다고 하겠다. 또한 자기 부정(self-negation)을 통
해 하나님이 십자가 고통에서 자신을 나타내었다는 생각 역시 헤겔적이라고 
하겠다.

또한 인간과 질적으로 영원한 차이가 있다는 초월적 하나님이라는 실존주의
적 개념은 사실 현재속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고 계속적으로 열린 미래로 남겨
져 있다는 몰트만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미래적 하나
님 혹은 약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은(칸트의 본체론적 세계 하나님 혹은 바르트
의 전적으로 감추어진 하나님과 같은) 현재의 그 무엇과도 결코 동일시 되지 
않는 긴장속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이것은 칸트의 현
상적 세계에서의 범주적 의미나 계시 속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타났다는 바
르트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초월적 하나님(희망의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
가 잡을 듯 하면서 못잡고 또한 역사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무엇인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 듯 하면서도 계속 신비나 가능성으로 남게 되는 그러
r
한 역설적 긴장이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또한 미래적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고통, 아픔, 갈등 등을 체험한다는 것은 하
나님의 자유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바르트의 사상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핵심적 성품은 미래적이라는 몰트만의 주장
은 하나님의 핵심적 성품은 그의 자유라는 바르트의 생각과 별 다를 바가 없
는 것이다.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 천상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십
자가 사건에서 나타나는 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자유
를 갖고 계셔서 그리스도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감추시고 동시에 전적으로 나
타나셨다는 바르트의 주장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로 미래에 대해 희망하도록 하는 것은 일종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어떠한 근거가 없니는 불가능한 것이다. 몰트만은 그 근거
를 추상적 미래에 두는데 그런 미래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주는 것은 하나
도 없다. 즉 그런 미래는 없다고 믿는 것과 그런 추상적 미래가 있다고 믿는 
것과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미래가 전적으로 순수하게 열려
져 있다고 
하는데 만약 희망을 위한 어떠한 근거가 미래에 있다면 그 미래는 
전적으로 순수하게 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전적으로 순수하게 
미래가 열렸다는 것은 일종의 절대적 신적 의미를 미래에 부여하려는 발상인
데 이러한 발상은 비합리적(irrational) 신념과도 같은 것이다. 그 신념이 어
디에 있는 것인가? 그 신념은 바로 현재 몰트만 자신에 있는 것이다. 즉 결
코 미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 혹은 종말은 구체적 과거 사건에 근거하는 것이
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적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몰트만이 주장하듯 미래에 속한 사건이 아니다. 사도들이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다. 몰트만의 십자가-부활 사건 해석
은 그 옛날 영지주의나 가현설과 같은 이단 사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역
사적 십자가-부활 사건은 계속 우리 현재에 그 구성적(constitutive) 힘을 끼
치고 그가 재림하실 때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부활 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의미
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규범적 근거와 종말론적 근거가 추상적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서 이루신 그 역사적 사건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모르고 미래에 대해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
을까? 즉 희망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은 미래
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에 근거해서 가질 수 있는 지식이다. 이 
지식에 근거하여 우리가 무엇인가 미래에 대해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미
래에 대한 희망이 과거와 현재없이 중립적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
는 것이다. 몰트만은 역사속에 과거-현재-미래라는 등식이 아니라 거꾸로 미
래-현재-과거라는 등식을 세워 마치 미래가 현재을 구성(constitute)하는 것
으로 믿고 있는데 이것은 허구일 뿐이다. 역사는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희망하고 신뢰하
는 것은 그 미래가 항상 열려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일 
그리고 지금 이루시는 일로 인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
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