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몰트만(J rgen Moltmann) (1)

0
85

위르겐 몰트만(J rgen Moltmann) (1)

정승원교수 

흥미롭게도 몰트만 역시 바르트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복음주의 신학자라
고 평가 받기도 한다. 얼마전 한국에 온 몰트만은 그래도 복음주의를 표방하
는 교회에서 강연을 했고, 한 복음주의 신앙서적에 그와의 인터뷰 내용까지 
나온 것을 보면 더욱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를 복음주의자로 오해하는 이
유는 아마도 그가 늘 성경, 삼위일체 하나님, 십자가, 부활 등을 말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는 결코 복음주의 신학자도 더
욱이 보수주의 신학자가 아닌, 한 자유주의 신학자에 불과함을 우리는 잊어서
는 아니될 것이다.

그의 ‘희망신학’은 사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블로흐는 막시스트적인 종말론을 거부하
고 열린 미래를 향한 종말론을 발전시켰다. 이 세상에는 정체된 정수
(essence)란 없고 단지 미래가 밝혀주는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
는 또한 미
래에 담겨져 있는 약속이야말로 현재에 희망을 주는 확실한 존재
적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몰트만은 블로흐와는 달리 미래를 어떤 유토
피아적 추상이 아니라 역사속에 진입되는 구체성으로 본다. 더욱이 하나님을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갑작스러울 정도로 놀랄 방법으로 인간 역사에 관여하
고 인간 세계와 약속을 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물론 몰트만은 하나님을 어
떤 변하지 않는 ‘존재’로 보기보다는 세상과 관여됨으로 나타나고 알려지는 
역동성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하나님이란 스스로 존
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하나님
의 핵심적 성품은 바로 미래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
할 수도 없고 현재에 가두어 둘 수도 없다고 한다. 미래가 아직 도착하지 않
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현재에 다 나타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계시를 미래에서부터 오는 어떤 약속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므
로 전통적 기독교에 주장하듯 계시란 어떠한 명제적(propostional)인 것이 아
니라고 강조한다. 계시는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제적이
라 한다면 그 계시가 근거하는 미래는 열린 미래가 아니라 닫힌 미래가 된다
는 것이다. 즉 명제가 그 미래를 구속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바로 미래를 담
지하는 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즉 미래로부터 오는 자라
고 한다. 그의 부활을 과거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작과 역사
의 근저로 본다. 즉 부활을 미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 대해 정의할 때도 미래의 틀로서 정의한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와 같이 인간을 변하지 않는 존재로 정의하기보다는 ‘되어감’으로 정의한다. 
오직 마지막날에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게된다는 것이다. 그리
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현재를 초월하고 미
래를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종의 자유
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이 없다는 것이 죄라고 정의한다. 즉 미래
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일종의 은혜가 아니
라 행위를 의지하는 모습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마치 역사의 마지막이 이미 이르른 것처
럼 현재에 초점을 두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교회는 세상의 종으로서 미래의 약속을 선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그의 윤리관과 연결이 되는데, 윤리에는 이미 정해진 규범
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만이 윤리의 규범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윤리의 
기준은 미래의 결과에 대한 기대라고 한다. 즉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가 우리를 소외당한자들과 눌린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지금의 ‘무엇’에 도전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비록 막스적
인 개념은 아닐지라도) 혁명을 환영한다. 

그의 신학 중 특이할 만한 점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십자가 사건으로 설
명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게 되었
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존재론적(ontological)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일종의 경
세적(economic) 삼위일체를 주장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경세적 삼위일
체는 
우리가 믿는 구속사적 차원의 경세적 삼위일체가 아니다. 다른 많은 자유신학
자들과 마찬가지로 사건 속에서 발생되는 모습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는 것
이다. 십자가 사건속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십자가와 부
활의 의미를 교회에 부여하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역사를 성령으로 정의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에서 발생된 십자가 사건이 아니고
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 사건으로 하
나님은 세상을 향한 자신의 열림을 확증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