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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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1) 바르트의 계시관
먼저 바르트의 계시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대작 「교회 교의
학」(Church Dogmatics)은 크게 4권으로 (세밀하게 나누면 13권이 된다)
되어 있는데 (원래 제 5권까지 쓰기로 했으나 그의 생전에 완성하지 못
했다) 그 중 첫 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리’이다. 그의 신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말씀의 신학’ 혹은 ‘계시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씀’ 혹은 ‘계시’의 초월적 개념으로 ‘신학’의 가능성을 다시 확립
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 전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는 ‘신학’이 아니라
‘문화적 인간학’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바르트에게는 계시야말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유지하며 ‘신학’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사실 그의 계
시관은 단지 성경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계시관이 바로 신론이요
기독론이요 성령론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 신학의 핵심은 바로 그의
계시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바
르트가 말하는 계시란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그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인가? 그렇
지 않다. 물론 ‘계시’라는 말의 의미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뜻하기 때문
에 이런 형식적인 의미로는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라는 단어와 보통 우리
가 말하는 계시라는 단어는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계시관은 우리의
계시관과 다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바르트의 계시는 ‘초월적
하나님’의 ‘전적으로 나타나심'(wholly revealed)을 의미한다. 바르트에게
는 인간과 질적으로 영원한 차이를 가지신 하나님이 어떤 역사적인(달력
의 의미로) 사건이나 인간의 언어 속에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다. 이것은 다시금 신학을 인간학으로 만드는 일로 바르트는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
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든지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성경으로) 자신
을 계시했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지
않고 ‘사건’ (event)으로 자신을 나타내셨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건의
의미는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계시의 행위’를 의미
한다. 마치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했듯이 영원한 진리가 인간에 다가온 어
떤 역설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간적
나타나심(사건 혹은 행위)으로 하나님이 계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는 언어와 동일시 할 수 없고 믿음이 반영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한적이고 오류가 있는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 왜 바르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사건으로서의 계
시는 어떤 역사적 형태 혹은 방편을 동반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계시의 세 가지 방편으로 ‘그리스도,’ ‘성경’ 그리고 ‘설교’
를 말한다. 계시가 단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은 마치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
고 설교를 하나님 말씀 선포로 정의하며 그
위상을 높였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는 계시란 역
사적이지만 역사적인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계시가 역사적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
지만 역사적인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
일 수 없는 것이다. 계시가 역사적 성경에 나타났다고 해서 우리와 같은
성경관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에게는 역사적 기록인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더 핵심적인 것이다. 또한 바
르트가 계시의 세 가지 방편 중 하나로 ‘설교’를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
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나님 말씀 선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
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가 주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성경과 설
교를 액면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설교의 권위를 세운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설교 정도로 추락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
‘이다’는 우리가 믿는 식의 ‘이다’
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히려
그 말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순간적으로 된다(becomes)’로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은 오
히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죽은 말씀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
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경과 계시를 ‘동일화’ 함에 있어서 그것은 직접적 동
일이 아니라 간접적 동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
도 직접적 동일이 아니라 간접적 동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
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바르트도 성경의 영감
(inspiration)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영감은 전통적 기독교가 믿는 그러
한 영감이 아니라 초월적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함에 있어서 불완전한 인
간의 언어를 사용하셨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주장하는 것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다’라는 바르트의
주장을 듣고 그의 성경관이 복음주의적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성경관은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경관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