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사 비평’에 길들여지는 사회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목사란 진리를 위해 배고픈 배도 참아야 하는 고독하고 쓸쓸한 직무”
비평(평론)은 시, 소설, 수필, 희곡과 함께 문학의 5대 장르에 속한다. 비평가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은 비평 대상에 대하여 정확하게 그 가치와 미추를 평가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는 언젠가부터 “주례사 비평”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비평가가 작품과 문화 현상과 작가에 대하여 결혼식 주례를 하듯 장점만 이야기하는 주례사 비평은 그 순간은 비평가나 작가에게 좋을지 모르지만, 무엇이 작품과 작가의 문제와 한계이고 무엇을 지향하며 어떻게 탈출구를 마련해야 하는지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그 작가와 그 사회 전체에 큰 손해를 끼친다.
신학을 다루는 학회가 한국에 몇 개 되지 않고, 그 마저도 신학적 성향에 따라 구분하면 신학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학회가 두서너 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와 언약을 전공하였는데, 에드워즈를 전공하고 학회에서 활동하는 신학자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한 번 학회에 참여하여 같이 식사하고 나면 이런저런 인맥으로 서로가 관계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렇게 관계와 얼굴을 확인한 신학자의 논문을 논평하게 될 때 주례사 비평을 벗어나려면 다소 용기가 필요하다.
필자는 지금 노회장으로 있다. 각 지교회의 일과 관련된 안건이 노회에서 논의될 때 노회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쉽지 않다.
먼저는 십 년, 이십 년씩 같은 노회에 있다 보면 노회원들끼리 친해진다. 친해진 노회원에게 불리한 발언과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또 그 목사가 겪는 일을 바로 자기 자신이 겪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백한 잘못임에도 자기에게도 약점이 되는 사안은 하나님의 말씀과 노회의 규칙보다 대강 얼버무려 처리하려는 유혹을 강하게 받는다.
마치 학회에서 내가 신랄하게 논평한 논문의 저자가 일이년 후에는 다시 내 논문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평자가 될 수 있으므로 서로 주례사 비평에 머무는 논평을 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받는 것과 같다.
황우석 사태를 우리 사회가 겪은 것도 애국심과 효율과 생산성에 취한 비평가들이 날카롭게 황우석의 연구물에 대하여 메스를 들이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황우석 씨에 대한 언론의 비평은 주례사 비평 수준이 아니라 찬양 일색이었다. 올바른 비평가가 되기 위해서는 낭만적인 감정들과 잘못된 애국심에서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훌륭한 비평가가 되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의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주례사 비평은 출판자본의 영향력에 문학이 포섭된 결과라는 진단이 나오곤 한다. 한 권의 문학 책이 나오면 출판자본의 영향을 받는 비평가들이 마치 새로운 시도와 시대정신을 담은 냥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언론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쓰고, 독자들은 새로운 시도와 시대정신이란 평론에 유혹되어 지갑을 열게 된다.
작가들은 고착되는 주례사 비평으로 평론가의 날카로운 지적을 피할 수 있기에 다소 천박과 상투적인 기법이 있더라도 흥행성이 있는 작품들을 내놓게 되고, 그러면 한국의 문화 수준은 떨어지고, 옳음과 틀림에 대한 기준도 흔들리고,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격조도 떨어지는 것이다.
교회자본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초청받은 교회의 단점과 담임목사를 날카롭게 비평하는 목사들을 어느 교회에서 헌신예배나 임직식 때 강사로 불러주겠는가? 부르는 교회가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설교시간에 해주는 목사를 부르지 않겠는가? 그들의 간지러운 귀를 만져주는 달콤한 소리를 하는 설교자가 부름을 받아 몇 십만 원의 설교비를 받지 않겠는가? 또 자기가 칭찬을 해야 그 교회의 목사도 자기 교회에 와서 자기를 칭찬해주지 않을 건가? 서로 주례사 비평으로 품앗이 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갈멜 산으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모으라고 말하면서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선지자는 더 이상 선지자가 아니라 어용 선지자이다. 그들은 상의 음식을 제공하는 주인이 듣고자 하는 소리만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이다. 짓기를 그친 개인 것이다. 선지자는 누구의 상에서 먹으면 안 되고, 상 위의 음식을 위해서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선지자와 목사는 때로는 진리를 위하여 배고픈 배와 다수의 지지를 참아야 하는 고독하고 쓸쓸한 직업인 것이다.
돈은 교회 자본과 교회 권력에서만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돈 많은 권사의 치마 밑으로도 흘러나온다. 목사가 권사들의 치마 밑으로 흘러나오는 봉투에 길들여지면 그들의 가려운 귀를 간지럽게 해주는 사욕의 스승에 지나지 않게 된다. 돈 많은 욕정의 성도들에게 영적이란 영역에서 즐거움을 선사하는 엔터테이너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날 선 비판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100미터 밖의 잔디밭에 있는 잡초까지 찾아내는 깐깐한 검사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골로새서 4장 6절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말한다.
날선 배추가 소금을 뿌려 놓으면 숨이 죽으며 김치를 만들기에 적합하게 푹 늘어지고 짠 맛도 배인다. 기독교인의 말은 날 선 말이 아니라 소금으로 고르게 된 말이다. 주례사 비평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잔혹하고 신랄한 비평도 아니고, 소금으로 고르게 된 비평인 것이다.
주례사 비평 대신에 옳음과 배려와 사랑이 소금처럼 깃드는 비평이 한국 교회에 넘쳐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