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기도를 통해 보는 기도의 자세
< 강영모 목사, 과천한샘교회 >
“인생의 연륜만큼 하나님 앞에서 성숙하고 정직한 기도할 수 있어야”
시작하는 말
야곱은 흔히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성공 지향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야곱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일방적인 편견을 낳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20년의 간격을 두고 행한 벧엘에서, 그리고 다른 한번은 에돔들에서 드렸던 그의 기도의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굴곡진 인생과 깊어진 신앙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그의 기도의 변화를 통하여 그의 진면목을 직시하게 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암시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도망하는 중에 보여준 기도와 20년 후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나와 “에서”에게로 귀환하는 중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 이 두 번의 기도에서 그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1.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한 첫 번째 기도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로서 이 둘 사이에는 날 때부터 저절로 서로에게 경쟁 관계가 형성된다. 그들은 사실 태어나기 전에 벌써 어미의 태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두 생명체가 잉태되면서부터 이미 그 경쟁은 시작되었고 쌍둥이를 중심으로 이삭의 가정에는 여러 가지 해프닝이 일어난다.
에서와 야곱이 장성하였을 때 사냥에서 돌아온 배고픈 형의 약점을 이용하여 아우는 장자의 명분을 사게 되고 야곱은 급기야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마저 속이면서 장자의 복을 가로챈다. 그 결과 야곱은 에서의 미움을 사고 밧단아람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야곱은 마치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사듯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식의 기도를 했다(창 28:20-22). 즉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 중이던 한 젊은이가 하나님을 매수하여 불안한 미래와 알 수 없는 자신의 앞길을 순조롭게 풀어가 보겠다는 의도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과연 ‘성공 지향적’인 야곱다운 발상이며 저돌적인 야곱에 어울리는 기도가 아닐 수 없다. 야곱의 첫 번째 기도를 오늘 우리들의 표현으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 이번 일만 잘 되게 해주신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십일조도 바치겠습니다. 제발 이것만 들어주십시오. 그러면 뭐든지 다 할께요.”
2. 하나님께 모두 맡긴 두 번째 기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야곱은 라헬과 레아를 위하여 각각 7년씩 14년, 양떼를 돌보는데 6년을 일하여 제법 큰 재산과 일가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야곱은 지난 20년간 라반에게 당한 고통과 억울함을 통하여 2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즉 형의 배고픔을 약삭빠르게 이용하고 눈이 희미한 아버지마저 속인 자신의 저지른 행위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자각을 할 즈음에 귀향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가나안으로 돌아가려니 20년 전의 광경이 눈에 어른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20년 전의 원한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에서를 어떻게 대면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20년 전에 그를 피할 때의 새로운 환경, 낯선 세상이 아니던가? 이런 점에서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할 때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가 다시금 야곱을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20년 전에 기도하였던 베델 근처의 강둑에 와서 다시금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그게 바로 즉 야곱의 두 번째 기도이다(창 32:9-12). 그런데 놀랍게도 야곱의 두 번째 기도에는 처음 기도와 전혀 다르게 하나님과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고 음식, 의복, 재물, 안전한 귀가 등 ‘우리들의’ 일상적인 기도 목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 주님은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을 만큼 기대 이상으로 제게 이미 베푸셨습니다. 제가 주께 기도하는 것은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이면 제가 독을 품고 있는 형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에서를 대면할 일이 무섭습니다. 주님 없이 혼자 감내해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있다.
3. 본받아야 할 야곱의 성숙한 기도
우리는 야곱의 두 기도를 통하여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잘 몰라도 성숙한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야곱이 20년 전에는 마치 어린 아이가 기도하듯 하였지만 인생의 연륜과 신앙이 농익자 전혀 다른 성숙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야곱의 두 번째 기도는 도덕적으로 부정하다는 의미인 ‘속이는 자’라는 야곱에서(창 27:36; 렘 9:3; 호 12:3) ‘이스라엘’로(창 32:28), 그리고 더 나아가 정직한 자 ‘여수룬’으로 바꾸어 놓는다(신 32:15; 33:5,26; 사 44:2). 비뚤어진 야곱이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바른 사람 여수룬으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야곱의 첫 번째 기도만 되풀이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