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쓴 장로교회 표준문서 <6>| 사보이 선언과 회중교회주의자_배현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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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 선언과 회중교회주의자

< 배현주 목사, 주교개혁장로교회>

 

정통 교리가 없다면 회중이 있어도 정통 교회라고 할 수 없어

 

1659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했던 회중교회주의자 성직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사보이 선언을 주장하였다. 이 사보이 선언은 회중교회주의를 고백하고자 함이었다. 많은 부분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따라간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교회 정치 부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달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기간에 대다수의 장로주의 퓨리턴들과 교회 제도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 하였던 회중교회주의 퓨리턴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웨스트민스터 총회 석상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다섯 명의 형제들(dissenting brethren)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독립 교회 제도의 주창자들은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예레미야 버로우(Jeremiah Burroughs: 1600-1646), 필립 나이(Philip Nye:1595-1672), 시드락 심슨(Sydrach Simpson: 1600-1655), 윌리엄 브릿지(William Bridge:1600-1670) 등이다.

이렇게 의견을 달리하는 회중교회주의 퓨리턴들은 후에 독립교회파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들은 뉴잉글랜드에 이주하여 있던 존 코튼(John Cotton: 1585-1652)과 존 오웬(John Owen: 1616-1683)과 함께 회중교회주의자들로 분류가 된다. 그들은 교회 제도에 있어서 분리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 대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성직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총대로 파견되었던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는 그들의 교회 정치에 대한 견해를 분파주의로 정죄하였다.

그리고 다니엘 코드레이(Daniel Cawdry:1588-1664)는 그의 저서 “독립교회파: 위험한 분리주의자들로 입증된 존 오웬의 변론에 대하여서”(Independence, a Great Schism, proved against Dr. John Owens’ Apology, 1657)에서 그들을 분리주의자들(Separatist)로 정죄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석상에서 대다수 장로주의 퓨리턴들의 교회 정치에 대한 일치된 견해를 통하여서 회중교회주의자들의 분파주의적 교회관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회중교회주의자들은 교회관에 있어서 분리주의적이었다.

무엇보다 퓨리턴 초기 역사, 즉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토마스 카트라이트(Tomas Cartwright:1537-1603)의 영향을 받은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 1550-1633)에 의하여서 주도된 극단적 분리주의자들은 이미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프리머스에 정착하여서 자기들만의 독립 교회를 세웠다.

이들을 브라운주의자들(Brownist)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 분리주의자들과 또 다른 부류의 뉴잉글랜드의 온건한 분리주의자들을 함께 회중교회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이 회중교회주의자들은 교회 제도에 대한 분리주의적 입장으로 인하여서 17세기에 이미 신대륙에 정착해서 퓨리턴 정신을 심었지만 18세기 초에 신대륙에 세워진 장로교회보다 더욱 빨리 급속도로 정통 교리로부터 이탈하였다.

무엇보다 회중교회가 신대륙에 자유주의 신학의 첫 유입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이 19세기에 회중교회 구빛파(Old Light)를 통하여서 신대륙에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회중교회 구빛파는 신대륙에 자유주의 신학의 교두보였다. 이렇게 회중교회가 정통신학으로부터 이탈이 빠른 것은 회중교회 교리가 처음부터 정통 교리로부터 이탈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1967년 미합중국 주류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폐기시켰을 때에 미합중국 안에 정통 신학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훨씬 이전에 회중교회주의자들은 정통 개혁 교리로부터 아주 쉽게 이탈하였다.

무엇보다 회중교회주의자들과 전혀 무관할 수 없었던 신대륙 장로교회조차도 신학파(New School)의 타일러를 중심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장로교회에 유입되어서 구학파(Old School)의 구 프린스턴 신학교의 정통주의 신학자 찰스 핫지와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 신학파는 회중교회주의자들과 매우 친밀하였고 결국 이는 장로교회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 경로가 회중교회주의자들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회중교회는 정통 교리로부터 이탈하여 있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였던 성직자들을 존중한다. 그분들은 그 시대에 최고의 석학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정치에 있어서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선언한 사보이 선언은 아쉽게도 분파주의자적 선언이었다.

교회의 보편성을 파괴시키며 단일한 개교회가 완전한 교회라고 주장하는 회중교회주의는 잉글랜드에서는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을 통하여서 그 열매가 만발하였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은 철저하게 실패한 혁명이다.

그런데 청교도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든 분파주의자들이 자기의 권리를 가지고 정통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결국 청교도 혁명은 교회 몰락의 혁명이 되고 말았다. 단지 크롬웰 본인의 독재 체제 구축의 수단일 뿐이다. 

왕정 복고 이후 잉글랜드 교회의 감독교회로의 회귀는 청교도 혁명의 반작용이다. 회중교회주의자들의 분리주의적 교회관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심각한 보편 교회관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그래서 북 아메리카의 회중교회주의는 정통 신학의 몰락을 자초하였다. 유니테리언,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등등 모든 분파주의자들이 잉글랜드로부터 이주해서 북 아메리카에서 자양분을 얻고 동아시아의 피선교국에 막대한 종교적 피해를 남겼다.

결국 회중교회주의는 교회의 보편성보다 개교회주의를 그리고 교리의 정통성보다 외양의 부흥을 추구하는 개신교 분파주의자들의 시조가 되었다. 비록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분리주의적 교회관은 정통 교회의 모든 신앙의 유산들을 유실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였다. 

무엇보다 분리주의적 교회관은 정통 교회관이 아니다. 사도 신조의 네 번째 부분 “나는 거룩한 보편 교회를 믿습니다”(Credo in Sanctam Catholicam Ecclesiam)라고 할 때 “거룩한 보편 교회”(Sanctam Catholicam Ecclesiam)란 달리 해석하면 “세상과 구별되는 보편 교회”를 말한다.

“거룩하다”라는 의미가 히브리어 “콰도쉬”(שׁדק)에서 왔다면 그것은 세상과 구별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이 된다. 세상 한 가운데 있으나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이 거룩한 보편 교회이다.

그런데 거룩한 보편 교회란 사도 시대 이후로 결정된 보편 교회의 정통 교리에 기초한다. 사도적 가르침(διδακη)의 보편성을 잃어버리면 그 교회는 분파주의 교회가 된다. 그것은 사도 신조(Apostle Creed) 이후에 니케아 신조(Nicene Creed:A.d. 325), 칼게돈 신조(Chalcedonian Creed: A.D. 451),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an Creed: A.D. 4th Century)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신조들은 보편 교회가 진리를 따라 결정한 정통 교회의 표준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정통 교리를 상실한 교회는 더 이상 정통 교회가 아니다. 참된 교회란 정통 교리가 있는 교회이다. 정통 교리가 없다면 회중이 있어도 정통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정통 교리는 교회 성립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다. 

회중교회주의는 여하한 경우에도 사도 신조가 증거 하는 거룩한 보편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