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인생의 의미
김영규 목사·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하나님은 최고의 상급이요 보상이며 근본적 위로”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지금도 인류 앞에 놓여 있는 난제들을 걱정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무리들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한 국가나 한 지역에 매여 그 자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전전긍긍하는 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자들 개인이 자신의 일상의 문제들을 걱정하고 자신들에게 당면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 개인적인 생활에서나 세상의 걱정거리에서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뜻이 가장 우선이 되고 있다면,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나 자신의 문제는 항상 만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얽혀있는 상태에서 우선적으로 요구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일상 생활과 멀리 있지 않다는데 있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는 지구환경의 위협도 있고 국지적인 전쟁의 위협도 있지만 멀리 지구의 역사, 우리 은하계의 역사 그리고 우주의 역사도 있다. 인간적으로 보면 우리 앞에 있는 그런 역사들의 궁극적 목적에는 우리 지역,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의 가정에서의 독특한 삶이 그 중심에 있다. 어느 경우이든 그리스도의 삶에는 새로운 해라고 해서 그 새로운 시작이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다만 어느 순간이든 그리스도인들이 그 삶에 있어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죄 문제이다. 즉 인간의 최초의 타락이나 전 인류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피조물이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은 피조물의 본성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피조물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존재와 비 존재 사이의 경계선은 하나님의 뜻에 있기 때문이다.
피조물 중에서 인간은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성향이 있고 하나님처럼 그 속성들을 발휘하는 발전 방향이 있다. 역으로 말하면, 자신 밖에 하나님이 필요 없는 근본 방향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가 인간에게 근본적인 죄가 들어오는 자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 혹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방향이 있으면 그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더 필요한데,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필요로 하지 않는 방향이 있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교만이란 근원적으로 그 방향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서정이 유지되려고 하면 할수록 거기에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그 본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수단이기 이전에 그런 본성에 합한 행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종교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이 그 고유성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 초월적 존재를 설정하여 기도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 그 특징이지만, 자신을 창조하신 그런 존재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창문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과 우리들에 대해서 스스로 나타내시는 방법 밖에 없으실 때, 성경에서 끊임없이 지적하는 사실은 우선적으로 그런 근본적인 죄에 대한 문제였고 그런 죄에 실제적으로 빠진 역사에 대한 것이다.
독자들은 새 해의 첫 글에서 왜 그런 부정적인 죄에 대해서 지적하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처음부터 그런 죄에 대한 시작과 그 역사에 대해서 기록한 것은 우리의 첫 인상과는 정 반대라는 것이다. 그런 죄에 대한 기록은 실제적으로 소망에 대한 기록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긴 역사를 가지고 풀고 있는 그 소망과 사랑의 역사를 백 년 전후로 사는 인간이 너무 성급하게 풀고자 하는데 있을 뿐이다.
성경의 계시에 기록된 대로 죄책과 오염, 고난과 죽음, 그리고 비 존재를 향한 방향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실체적 속성들 혹은 본질적 속성들이 유효적 원인으로 있는 이상, 절대적 비 존재란 없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위협과 경고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큰 위로라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계적 종말이나 영원한 죽음이란 없고 우리가 급하게 두려워하는 죽음도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리는 통로에 불과하다는 시종 일괄적인 메시지는 사실이전에 바르게 살아가야 할 위로와 용기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들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제외된 역사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위해서 극 거시세계에서나 극 미시세계에서나 그가 이루시는 역사들을 피조물들에게 양도하신 일이 없으심을 가르치신다.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들의 최고의 상급이요 보상이며 근본적 위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복과 소망이 있다는 것은 그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는 피조물들의 자세와 행위들을 염려하고 걱정하시되 그들이 알지 못하여 저질러 놓은 불행을 항상 행복으로 바꾸어주시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미래를 걱정하는 국가 위정자들에게는 물론 모든 소시민들에게까지도 복이 되고 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이미 복을 받고 있다. 필자는 모두가 오는 한 해도 이미 받은 복을 누리고 감사하는 삶만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