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개혁교회의 모범을 생각하면서
< 온유한교회, 변세권 목사 >
“경건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개혁주의 정신 이어가기를”
지난 가을 교회의 배려로 영국에서 짧은 리서치 기간을 가졌었다. 평소에 개혁주의 원리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다보니 때로는 목회현장의 결과만을 보고 나도 모르게 역동성도 없어 보이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실 성경의 원리를 충실하게 따라가면 되는데 우리 한국교회는 예배를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인간적 고려를 지나치게 하다 보니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을 인간과 타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늘 혼란이 오고 갈등이 있게 된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신학 원리나 개혁주의 도서들을 보면 이론적으로는 다 맞는 말들이다. 무슨 원칙주의나 근본주의를 몰라서 이거나, 아니면 인간의 타락성이나 인간 이해나 인간 실존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격이나 목회 현실에 대한 적용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말대로 “성도는 누구든지 정직한 질문을 해야 되고, 목사는 정직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기억난다. 지금 우리가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초기에 전달된 잘못된 개념들로부터 문제의 주원인이 된 것 같다. 곧 신앙고백 제정과 올바른 교회론 정립에서 실패한 것이다.
지금까지 교파를 초월해서 모든 교단의 신학 사상이 목회 현장에서 거의 같은 적용을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개혁주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인데 현실적용은 복음주의권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여기서 갈등한다.
그러나 역사적 개혁파 교회는 어떤 면에서는 세속적 가치관과 반대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라도 이런 부분들에 대해 그동안의 잘못된 관습을 벗어버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현대교회로 연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처럼 교회들이 인본주의 기독교 종교단체로 전락하는 현상이 두드러진 불행한 시대를 사는 때도 없을 것이다. 다행히 교회개혁기에 하나님께서 많은 개혁자들을 보내주시고 특별히 칼빈을 보내셔서 개혁파교회의 신학을 정립케 하신 것은 당시뿐만 아니라 그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로서도 참으로 큰 복을 누리고 있다.
칼빈은 만 55세도 안 되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신학적인 업적은 아직까지도 개혁파 교회에서 움직이지 않는 큰 기둥으로 우뚝 서 있다. 중요한건 칼빈의 교회 원리를 따라 가야하는데 우리가 흉내만 내는 칼빈주의는 구조와 방법론을 따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라도 칼빈의 교회원리를 새로운 교회시대의 원리로 채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의 주류를 형성해나가야 하는 우리의 시대적 사명을 분발하고 각오를 새롭게 다져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개혁교회의 교리교육의 중요성과 칼빈신학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적용이 있어야 한다.
칼빈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신학이 일평생 교회라고 하는 목회현장과 분리 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말은 칼빈의 저서와 목회 중심에는 항상 교육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확실한 신앙고백이 교회의 반석’이라는 평소의 생각은 칼빈의 심중에 움직일 수 없는 확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신앙고백의 중요성과 교육의 중요성이 칼빈의 신앙기반이다.
개혁파 교회의 신학 원리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삼고 ‘작지만 아름답고 당당하게’ 그러면서도 ‘경건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개혁주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부족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교단 안에서 이렇게 멋진 개혁파 교회들이 많이 세워졌으면 한다.
아마 이런 교회관은 그래도 우리 교단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한 선물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개혁주의 교회의 모델은 우리 교단이 잘 할 수 있는 일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