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과연,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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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는가?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남북의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은 미래 선진국형 국민의 삶의 질을 목표
로 하여 그 비용이 많이 든다는 말일 것이다. 시간은 걸리지만, 북한 국민
이 스스로 미래 선진국형 삶의 질로 높여가도록 돕는 것이 미래 한민족 전체
가 서로 지어야 할 통일비용을 줄이는 방법일 수 있다. 

미래 선진국 꿈꾸는 한국

문제는 남한의 경우조차도 그 정치적 성숙도나 각 경제 주체들의 삶의 질에 
있어서 그 수준이 현저히 떨어져가고 있는 실정에 북한의 그 정치적 성숙도
나 그 국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
다. 
미래 사회에 선진국형으로 가기에 필요한 국민의 절대 수가 부족해 가고 노
령인구가 늘어가는 추세에 100년을 앞두고 국가재정을 꼼꼼히 챙겨서 국민
의 설득과 예측 가능한 정책에 따라 우선되는 투자
와 개발내용을 선정하고, 
적어도 100년 안에 중복투자가 없이 그 비용을 절감하고자 하는 성실성이 결
여되어 있는 남한 총체적 위기가 바로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데 그런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북한의 인권문제는 북한 지도자들의 개인에 있다기보다는 그 정치체계에 있
다면, 남한 지도자들의 무능력으로 인한 미래 국가사회에 미치는 피해에 대
해서 책임을 지려는 마음이 없는 것도 남한의 인권문제이다. 거리에 도둑이 
없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귀중히 여기면서도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 질서를 지키며 세계인으로서 모범적인 국민정신의 성숙도가 
통일 비용을 적게 하는 가장 귀중한 자산이 됨을 모르고 있는 것도 인권문제
에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런 시대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가? 교회가 지상에 있
는 것은 교인이 그 땅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에 있지 않다. 미래 한국사회에 
예측 가능한 분명한 내용은 노인인구는 그대로 큰 변화가 없는데 젊은 세대
의 인구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방뿐만 아니라 도시사회에
도 점점 더 인구밀도가 떨어질 것
은 당연하다. 당연히 교회에 교인들의 수
가 줄어들 것이고 각 교인이 책임을 져야 할 교회의 짐도 무거워지게 마련이
다. 거기에 따른 교회 안에 변화가 클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 지도자들이 기본적인 예측을 무시하고 성장위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나 개인이나 어떤 순간 이미 일어난 잘못된 일은 그 
정체성과 함께 자체와 자신에게 이미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보험설계사의 경영방식을 경쟁하여 도입하고 교회의 가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경영실적을 높일 수 있는 자격자에게 성경에도 없는 성직(목자장)의 이
름을 주며 현대 경쟁사회 안에 겨우 존속하고자 성경이나 성경공부 및 조직
구조를 지식경영에 이용하고자 서두르고 있다면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 세속화는 교회가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 급하게 흡수되어 저절로 갑자
기 사라지게 하는 행위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도 외면하고 성경도 없이하며 
순교의 역사로 교회가 세상에 있도록 했던 긴 역사를 한꺼번에 소멸시키는 
행위이다. 
현재 과학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일상 자체가 얼마나 큰 기적의 세계인지를 
배워 가는 시대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상의 모습을 
비약하거나 역행하는 방식으로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메추라기가 떨어지
며 바위에서 물이 나게 하는 그런 기적들을 베푸셔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 
가게 하는 방식을 취하셨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
이 우리 앞에 있는 물이나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기적의 세계인지를 깨닫
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구나 기술에 의해서 달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세계적으로 
유행되면 될수록, 과거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있었던 신화나 동화의 시대로
부터 진실 혹은 현실의 세계로 가는 방향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는 운동
이 될 것이지만, 오히려 그런 경험 자체가 우리에게 가까운 우주 자체조차
도 얼마나 무한한 질서들의 신비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즉 과학 기술의 발달을 통하여 인간이 스스로 자연의 질서를 만들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창조적 아이디어가 필요로 하는지를 배우면서도 그런 질서
들에 대한 상상들 중에 그것에 적합한 한 질서가 선택된다는 것조차도 얼마
나 큰 기적인지를 알아 가는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일상의 그런 기
적을 체험하는 일을 넘어 과거 거시세계의 기적들과 영적 세계를 믿을 수 있
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 교회이다. 
그런데 교회가 겨우 지식경쟁 사회에 선두에 서 있는 그룹들과 어느 정도 적
응하는 그룹들 그리고 거기에 낙오자가 되어져 가는 그룹들 중에 교회에 출
석할 수 있는 그 소수들을 흡수할 수 있는 준비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
려 교육과 전문성에 있어서 세속과의 가치의 차별화로 그 그룹들을 전부 흡
수해도 모자랄 지경인데도 그렇다. 더구나 신학교육이나 교회교육에 있어서 
그리고 교회 정체성에 있어서 그 가치 차별화에 뒤져 있고 그 전문성에 있어
서도 교회가 포기하고 있다. 
선교나 현대사회에 낙오자들에 대한 배려는 교회가 저절로 짐을 지게 되어 
있다. 적어도 교회는 현대 사회 전체적 가치의 구조조정에 기여할 때만 사회
복지단체나 문화단체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회의 정체성과 교회생
활에 과거의 어떤 시대에도 할 수 없었던 고도의 신학화 작업이 필요로 하
고 있다는 말이다. 
이 신학화 작업이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회복의 대명사인 바른 개
혁신학으
로 돌아가 그 실천적인 의미를 정립하고 하나님을 이제 사실 자체로 발견하
는 일이다. 그런데 총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도르트 신조를 만장일치로 바로 받아들이는데 실패하였으니 언제 그런 기대
를 할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의 미래 불투명해

적어도 한국장로교회가 고백으로 채용한 인도의 연합장로교의 12개 신조의 
서문에는 분명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및 도르
트 신조를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 있는 해석들(worthy exponents)로서 그리
고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교리체계들(systems of doctrine to be 
taught in our churches and seminaries)이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