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진한 사랑’
이은국 목사_용연교회
초겨울의 따스한 볕이 내리쬐는 한 낮 무렵 산책길에서 노(老) 권사님을 만났다. “권
사님! 뭣하고 계십니꺼?” 흘긋 마주친 만남이었지만 곧바로 반가운 기색을 띠며 대답
하기를 ‘할 일이 없어서 조금 전에 한 번 올라와 봤슴더!’ 하시며 댁에서 제법 떨어
진 거리에 있는 남새밭에서 시금치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다가오는 주일 점심 식탁에
오르게 될 성도들을 위한 아름다운 섬김을 일찌감치 장만하고 계신 것이다.
섬김 실천하는 권사님
구십 평생을 한결같이 주님과 함께 하며 지금껏 새벽기도 시간을 놓치지 않으시는 그
믿음의 터전이 든든하다. 몇 분이 지난 후 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또 한 분의 집사님을
만났다. “무 배추는 걱정하지 마이소!” 평소 정성껏 기른 농작물을 죄다 교회에 갖
다 놓으시고 성도들에게 나눠주는 기쁨을 낙으로 삼는 분이시다.
때 마침 전화가 걸려와서 고갯짓 인사만 드리고 그냥 지나친 것이 잘못이었나 보다. 나
중에 만나서 하시는
말씀이 ‘와 그냥 가셨능교 집에 들어오셔서 물이라도 한 잔 대접
해서 보내드려야 했는데…’ ‘그냥 보내드려서 눈물이 났다 아닙니꺼!’ 한다. 한마
디로 극진한 사랑이다. 이들의 얼굴에서 비쳐지는 환한 모습들은 밀레의 만종 작품보
다 더 아름다운 그림이 아닐까 싶다.
올 해 교회 김장은 지난 해 확보한 예배당 텃밭에서 재배한 싱싱한 배추를 사용했다.
운반해 오는 수고도 없었고, 배추 값으로는 종자돈만 들어갔을 뿐이다. 집사님이 운영
하는 목장에서 거름을 가져와서 듬뿍 쏟아놓은 탓인지 아니면 성도들의 사랑스런 보살
핌을 받아서인지 아무런 병도 없고 어쩌면 배추 꼴이 그렇게도 좋을까.
인정미(人情味) 넘치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농촌의 속사정은 어떨까? 익히 들어 왔던 그
대로다. 여기저기 주인 잃은 유휴경작지에 농작물을 대신하는 잡초가 무성해 가듯 농촌
의 길은 험산으로 접어드는 기분이다. 근간 주요 국가간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농업의 위기감은 고조되고, 농업 기피현상과 자녀교육 등 젊은이들의 이농으로 인한 농
촌 인구의 감소와 고령화, 농가 소득의 저하 등 사면초가를 이루고 있다.
극단적 표현으로는
농촌 해체라는 말까지도 심심챦게 들려오는 때에 농촌 교회는 현상
유지만이라도 해야 할 것이나 안간힘을 다해도 넘지 못할 산에 머물러 허덕이고 있다
는 생각마저 든다. 어제의 자립교회가 미자립 교회로 뒷걸음질 치지는 않을까 조바심치
는 초조함마저 없지 않다.
홀아비로서 빈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성경에는 왜 홀
아비를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은 없습니까? 과부나 고아를 돌보라는 말씀은 많건마
는…’ 이 말씀의 의미는 문자적인 특정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처한 사회
적 약자를 돌보라는 말씀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약자는 누구일까?
농자천하지대본, 즉 농업은 천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라는 의미는 그 빛을 바
랜 지 오래되고 이른바 농촌 총각들과 짝을 이룬 외국인 부녀자들이 한 둘씩 늘어나
고,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의 은신처, 가난한 빈곤층과 힘없는 노약자들이 더 해 가는
곳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농촌이자 농촌교회다.
오늘날 경제 성장과 도시 교회를 이루는데 산파역을 능히 감당해온 농촌 교회는 점점
기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 자녀가 자라
나서 그 부모를 봉양하는 심정으로 서
로의 두 손을 맞잡아야 할 것이다. 도시로 나간 자녀들을 위해 오늘도 기도의 끈을 늦
추지 아니하며 새벽을 깨우는 노(老) 성도들의 축복 기도를 잊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도시화 되어가는 마당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면 뭣하러 보조를 해야
하는가, 십년을 도와도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데도 계속 도와야만 하는가? 하
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물량주의적 판단에 불과하다.
농어촌은 마지막 선교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할 때 농촌은 땅 끝까지에 이르기 전 먼
저 펼쳐야 할 사랑의 대상이자 국내 선교지다. 진정한 이웃이요 형제인 농촌 교회를 섬
기는데 보다 비중을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