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웬 떡이지요?
이재헌 목사_대구 동흥교회
소담한 결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입가에 넉넉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수
확의 계절이다. 복잡한 도심 속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이 아름다움을 스쳐
지나는 길에 바라보며 짧은 기쁨과 상념에 잠겨본다. 황금물결을 이루며 풍
요로움을 자랑하던 들녘에는 어느 듯 부지런한 손길들이 땀 흘리고 간 자국
들로 장관을 이룬다.
풍요로움 춤추는 계절
막 알곡을 걷어낸 들판의 앙상함은 오히려 풍성함과 넉넉함을 대변하는 듯하
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풍요로운 결실과 넉넉함 속에 감사를 드릴 때면, 농
촌 교회를 섬기던 그 때가 생생히 떠오른다.
어느 해인가 가을걷이를 한참 해야 할 때에 이상 기온으로 인해 연일 비가
내렸던 해가 있었다. 논농사를 지어 한 해의 양식을 자급하던 동네 주민들
대부분이 계속되는 비에 추수를 할 수가 없었고, 틈을 내서 급한 대로 조금
이나마 추수한 사람들도 볏단을 말릴 수 없었기에 방아를 찧을 수 없는 상황
n이라 집집마다 쌀독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성도들이 정성으로 가져오는 성미로 양식을 삼던 터라 자연스레 목회자의 가
정에도 하루 하루 양식이 어렵게 채워지는 상황이었다. 넉넉지 못한 시골 형
편에 마트에서 쌀을 구입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인지라 성도들은 물론이요 마
을 주민들까지도 애를 태우고 있는 때였다.
집안의 행사로 인해 이틀 정도 교회를 비웠다가 돌아와서 막 사택에 들어서
는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그리고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
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메시지였다. 내 이름으로 서울에서 쌀이 두 가마니
가 왔으니 속히 역 수화물 취급소로 와서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시골로 쌀을 보냈다니, 누가?”
의아한 마음으로 역으로 갔더니 역시 두 포대의 쌀가마니가 내 이름을 달고
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서둘러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니 전혀 알
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단지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반가우면서도 흥분된 마음으로 쌀가마니를 싣고서 교회로 돌아 왔다. 그리고
는 집사님 한 분을 불러서는 까만 비닐봉지에다 두어 대 가량씩 쌀을 나눠
담아서
는 온 마을에 가정마다 나누게 했다.
급한 불을 끈 후에야(?) 가마니에 적힌 전화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듣게
된 내용인 즉은, 이 쌀을 보낸 분은 서울의 모 교회 집사님으로 전 주일 낮
예배 시간에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인용하신 우리 교회의 형편을 듣고서 마음
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시골집에서 보내 온 쌀을 다시 우리에게로 보냈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까마귀를 경험한 나는 얼마나 감격하며 기뻤는지 알 수 없다. 하지
만 더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 일 후 며칠 동안 날이 개면서 마을에는 집집
마다 탈곡기가 돌아가고 타작마당에 요란한 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온 동네
사람들이 줄을 이어 사택 마당으로 쌀자루를 들고 들어오는 것 아닌가? 그들
의 손에는 며칠 전 내가 주었던 쌀의 몇 곱절의 쌀들을 들고 오고 있었던 것
이다.
그 동안 모자라던 양식이 순식간에 넘쳐나는 풍요로움을 바라보면서 또 한
번 감사와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 주일날 성도들이 들고 온 쌀 중의 일부로
떡을 해서는 몇 안 되는 성도들이 모여 함께 떡을 떼며 기쁨을 나누었다.
“이게 웬 떡이요?”
성도들의 얼굴에는 감추지 못하는 웃음이 황금빛
들녘만큼이나 풍요롭게 넘
쳐흘렀다.
“쌀이 너무 많이 들어 왔는데 어떻게 하죠?”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우리도 신학교에 가서 점심 한 끼 제공하
자는 것이었다. 조그만 시골 교회는 일약 넉넉하며 부유한 교회가 되었다.
“식사를 전부 감당 하기는 무리가 있으니 일단 쌀 만 가지고 가서 헌물로
드립시다.”
이렇게 결론을 맺고서는 낡은 승용차에 커다란 쌀가마니 두 개를 싣고서는
콧노래를 부르며 수원을 향하여 달렸던 기억이 난다.
넉넉하고 부유함 느껴
나눔으로 인해 맛보았던 더 큰 기쁨과 풍요로움을 잊을 수가 없다. 황금빛
물결로 넘실거리는 들녘을 바라보며 십 오륙년쯤 전에 맛보았던 풍요로운 기
쁨이 다시금 세록거리며 솟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