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권사님이…
김승식 목사·영광교회
전에 모 교단에서 운영하는 수도원을 종종 찾을 기회가 있었다. 이용료가
좀 부담이 되긴 했으나 혼자만의 방을 사용할 수 있어 글을 쓰거나 책을 읽
는 데 더 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풍치 좋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원
은 대교회에서 운영하는 만큼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산을 오르
내리는 산책로가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 기도하며 사색하기에 더 없이 좋
아 하루에 서너 번이나 오르내렸다.
풍치 좋은 수도원 기억나
그런데 곳곳마다 ‘이건 아닌데 …’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팻말들이 눈에
띄었다. 십자가라든가 예수님 조형물 같은 것이 코스마다 설치되어 있는데
그 밑엔 어김없이 기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무슨 꽃밭조차 아
무개의 헌납이라고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이렇게 헌납자의 이름을 반드시
밝혀야만 하는가? 그런 의문이 맴돌았다.
수년 전에는 인천 강화도에도 매머드 수양관이 생겼다. 한국에서 그래도 보
수교단
중에 으뜸이라고 자처하는 모 교단에 소속한 교회에서 세운 시설이었
다. 그런데 이곳 역시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비석 같은 큼직한 돌판에 새겨
진 이름들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 나무 한 그루에도 아무개, 아무개 헌
납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는 것이었다. 별스럽게 나만이 느끼는 아쉬움일까?
물론 자기 이름이 들어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주님의 교훈
은 그게 아니지 않는가.
미국에 유명한 교회 중에 하나가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시무하는 크리스털 쳐
치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한번쯤 찾아가 보고 싶어하는 교회라고 알고 있
다. 필자는 아직 가보지 못했으나 전해 듣기로는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아름
다운 그 교회 크리스털 판 하나하나 마다에 헌금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 들었다. 과연 그것이 성경적일까?
한국 교회도 알게 모르게 이런 식으로 로버트 슐러 목사의 영향을 받지 않았
다고 부인하지 못하리라. 물론 그런 식으로 하면 교인들의 호응과 반응은 훨
씬 클 수 있다. 까놓고 말한다면 헌금이 더 나오게 되어 있고 소기의 목적
을 달성하는데 훨씬 수월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교훈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래 전에 한국 굴지의 신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으로선 교수실
인지, 기숙사 방이었는지 기억은 명확치 않으나 무슨 방마다 기증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출입문 위에 기증교회 이름 판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며 배운 목회후보자들이 목회를 할 때 역시 그런 유혹(방법)을 떨쳐버리
기 힘들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번에 우리 신학교 기숙사를 리모델링 한다고 한다. 그래서 침대니 책상 같
은 가구를 기증해달라는 공문을 받았다. 그런데 후원해 주신 방이나 가구에
는 후원 교회, 기관 또는 개인 등의 이름을 부착하여 후원해 주신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저렴한 것 중에 무얼 하나 해야 할까 고민하는 처지라 이런 제언을 할
입장도 못 된다. 그러나 책상이며 침대며 옷장이며… 온통 기증자 이름이 붙
어있는 신학교 기숙사를 들여다 볼 때 누가 봐도 그리 아름다운 풍경은 못된
다고 본다. 우리 교단과 신학교는 개혁교단임을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신학
은 개혁주의를 지향하는데 생활은 동떨어져 있다면….
물론 신학교
총무과에서 고민 끝에 내놓은 안 인줄 믿는다. 그러나 우리 모
두가 그 짐을 덜어주면 어떨까. ‘이름을 부착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는 후원을 고려할 것입니다’라고 애교섞인
협박(?)이라도 한다면 신학교 당국은 얼마나 짐이 가벼워지겠는가.
물론 후원에 대한 감사 표시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지면을 통해서라
도 후원에 대한 일차 감사 표시는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기증자 이
름 부착만은 피했으면 한다. 우리들의 교회를 볼 때 강대상이며 피아노 같
은 물품을 헌납해도 이름을 붙이는 일이 없지 않은가.
이번 신학교 문제뿐 아니라 수재민 구호헌금 등을 신문에 발표할 때도 액수
까지 발표하는 것은 삼갔으면 한다. 일반 교회에서도 헌금자의 액수를 공개
하지 않는데 하물며 교단에서 추진하는 행사에 액수를 기재하는 일은 교회
간에 위화감도 조성되고 그렇게 덕스러워 보이지도 않는다.
지난해 탄자니아 아르샤란 지방을 여행했을 때 일이었다. 아주 낙후되고 미
개한 마사이 부족이 사는 곳인데 우리 한인 선교사가 이 지역에 와서 수고하
고 있었다. 그 곳 황량한 들판 가운데 예
배당 건물 한 채가 서 있었고 마침
주일을 맞아 그곳에서 20여명의 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의미있는 마사이족 예배당
천이백여 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예배당과 사택을 지었다는데, 미국에 사시
는 ‘어느 권사님’이 헌금을 하셨다고 했다. 이 분이 암으로 죽어가면서 평
생에 예배당이라도 하나 짓고 죽어야겠다며 헌금하셨다는 설명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이었다. 예배당 안팎을 돌아보았지만 그 분의 이름
한 자 새긴 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