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향한 설교자
이재헌 목사_동흥교회
설교자만큼 대중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특별
히 한국 교회의 목회자는 다른 어떤 나라의 목회자들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만큼 신자들 앞에 서는 기회도 많고 접촉하는 시간
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진리를 알지 못하는 한 불신자의 입에서
“목사는 소위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 아닙니까?”라고 반문하던 말이 생각난
다.
설교자가 가장 말 많이 해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아마 진리를 알지 못하고 설교자의 사명을 잘 알지 못
했기 때문이거나 혹은 교회나 목회자를 비난하고픈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어
서 그렇게 말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일축해 버리기에는 조금 개
운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그렇게 무시하는 편보다는
그 말을 거울로 삼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책임과 자기 성찰의 자세가 있을 때
우리 자신에게 더 유익하지 않을까 생
각한다. 쏘는 자가 독을 담아 보낼지라
도 받는 자가 그것을 양약으로 바꾸어 놓을 수만 있다면 유익은 내게 남을 것
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책 읽기를 가까이 하지 않고 놀기만을 좋아하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개구쟁이 아들에게 한 아버지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야단을 쳤다고 한다.
“야, 이 녀석아! 링컨은 네 나이 때에 밤을 새우며 책을 보고 열심히 공부
를 했다는데, 넌 그렇게 책 읽기를 싫어해서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아들은 즉각 아버지를 향해 되물었다. “링컨은 아버지 나이 때에 미국 대통
령이 되었는데 아버지는 뭐하고 계세요?”
열정적인 설교를 마치고 땀을 닦으며 단에서 내려오는 나를 향해 혹 방금 내
가 했던 설교를 들은 교인 중 누군가 이 아이처럼 반문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
각을 해 본다. “그런데 당신은 설교한 그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라고 물
어 온다면 내게 답할 말이 있는가? 물론 언제나 내 자신에게 부끄럼 없는 말
씀만 전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충족할만한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사람들의 입
을 통하여 전해지기를 원하시어 그 일을 설교자에게 맡겨 주셨다. 그러기에
말씀을 담대하게 외쳐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인줄로 알아 내면에서 일어
나는 끝임 없는 부끄러운 갈등을 안고서도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혹자는 나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피커일
뿐’이라고 반박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스피커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온갖 잡음을 섞어서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로 인해 듣는 자의 입장에서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듣기가 어려울 뿐더
러 더 나아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경질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원음에 가장 가까운 소리를 내는 것일수록 좋은 스피커인 것처럼 하
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는 최대한 그 말씀의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
기 위해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셀 수 없이 수많은 말을 해야만 하는 설교자, 그래서 설교자는 ‘말하는
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말씀을 듣는 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
래서 나는 설교 할 때마다 청중석의 맨 앞줄 한 가운
데 자리를 비워놓고 싶
다. 그곳은 바로 내 자리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하여 선포하는 메시지가 나
의 영을 변화시키며 또 성숙케 할 때에 내 뒤에 앉은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능
력으로 나타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설교자 자신 향해 외쳐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 9:27)는 말씀이 열심히 설교 준비를 하
고 있는 설교자인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표지로 삼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가져 본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준비된 이 한 편의 설교가 내 입
을 통해 선포될 때에 가장 먼저 이 설교를 듣는 1차 청중이 바로 나 자신임
을 고백하면서 오늘도 힘있게 강단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