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생폼사_이은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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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폼생폼사

이은상 목사/동락교회

겨울이야기입니다. 한 신학교에서 불우이웃 돕기를 위한 찬양집회를 하였습니
다. 집회가 끝난 후 찬양팀과 그 외의 멤버들이 뒤풀이로 파티를 열었는데 
그 파티는 다름 아닌 뷔폐식당에서 건하게 먹는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찬양집
회를 하지말고 한끼 굶어 성금을 모았다면 어떠했을까 생각나더군요. 신학생
들의 문화는 배보다 배꼽을 더 사랑하는 문화인가봅니다. 

오월의 이야기입니다. 석탄일을 알리는 연등이 아파트입구에서 시작하여 대로
변 양쪽으로 길게 그러나 아주 촘촘한 간격으로 걸려있습니다. 어느 절의 석
탄일을 알리는 불교문화의 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연등은 석가모니의 자비
와 지혜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연등에 사용된 돈으로 실직자들에게 자비를 베
푼다면 참 지혜롭다는 말을 들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문화 역시 
배꼽이 배보다 더 큰 문화인가 봅니다. 

사월의 이야기입
니다. 부활의 영광을 알리는 부활절. 이번에는 월드컵이 개최
되는 주 경기장인 상암축구경기장에서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월드컵이
라는 문화를 이용해서 부활절이라는 복음을 알리자는 것이 목적이었겠죠. 그 
준비와 수고의 땀방울… 그러나 사전에 우려했던 것처럼 부활의 참 의미를 
되새기기보다 월드컵 사전 홍보 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평이 앞섰습니다.

“월드컵에 의한 월드컵을 위한 부활절”처럼 입장식부터 체육인들과 정치인들
이 나섰고 행사중간에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퇴장해 버렸답니다. 경기장 빌
린 돈으로 계란 삶아서 달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얼마나 신이 났을
까요? 신세대들은 만 원짜리 커피를 마시기 위하여 천 원짜리 컵라면을 먹는
다고 합니다. 그들의 문화처럼 최근의 기독교 문화가 ‘폼생폼사'(폼에 살고 
폼에 죽는) 문화가 되지나 않을까 염려를 해봅니다. 

혹자는 말할 겁니다. “문화를 경제라는 잣대로 봐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남
는 것은 살벌한 생존뿐이겠죠?” 물론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그 결과와 상관없
이 활동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마치 스냅사진을 
찍는 것이 앨범을 
메우기 위해서 찍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일등상과 관계없이 어린 자녀들의 발
표회를 적극 밀어주는 이유처럼 기독교문화는 흥행이나 결과에 최종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화가 대외행사일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
면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문화 자체로 종교를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죠. 문화가 곧 종교를 이해하는 코드가 된다는 말입니다. 가령 영화나 TV를 
통해서 전달된 특정한 이미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가 
상상에서 실재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조폭영화를 경계해야할 이유는 영화를 봄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얻어진 감정의 농축액을 삶의 구석구석에 뿌리게 된다
는 것입니다. 마치 거짓사회를 박살내고 싶은 충동이 곧 ‘두사부일체’라는 부
정적 윤리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돌이켜 보건데 사람들
이 월드컵 경기장에 다시 올 때 ‘기독교와 부활’을 생각하기보다는 ‘기독교
와 경제와 정치와의 미묘한 삼각 관계
‘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의 대외행사는 영적인 진리가 손상되지 않도록 존중 되어
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대외행사뿐 아니라 기독교 코드로 인식될 만한 모든 
것들 가령 자동차 뒤에 붙이는 물고기 표시라든지, 고급주보 및 전도용 인쇄
물과 선물들, 성경에서 빌려온 이름과 각종 상호들, 교회 차량, 교회 건축
물, 성탄절의 화려한 트리와 네온싸인 등이 기독교의 고장난 나침반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즉 기독교가 어떤 문화라는 옷을 입고 나설 때
는 거울 앞에 선 십대처럼 더욱 예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또 다시 절기가 온다면 그때는 기독교가 폄하되지 않도록, 아니 기
독교를 단지 ‘선전’하는 행사에 그치지 않고 진리를 고스란히 ‘선포’하는 능
력이 되기를 소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