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심력적 목회와 원심력적 목회
< 양승헌 목사(세대로교회 담임) >
“전도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전락된 것이 문제”
지난 여름 두달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팔레스틴에서 보내는 특권을 누렸
다.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정통파 유대 종교인들을 보며 내 눈에 비늘이 떨
어지는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유대 종교인들 통해 도전 받게 돼
그 더운 한여름에도 두꺼운 검은 외투와 돼지꼬리 같이 기르는 귀 윗머리,
새까만 모자를 쓰고 늘 토라 읽기와 기도에 투신하는 이들의 종교적 열정을
누가 감히 흉내나 내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회당에서, 그들과의 삶의 현장에
서, 그들과의 마주침에서 난 마치 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외계인처럼 느
껴졌다.
‘나’라고 하는 이방인은 그들의 눈에 그저 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나 고양이처
럼 보이는 듯 싶었다. 이방인인 나와의 접촉을 통해 부정을 탈까봐서인지
단 한번의 미소도, 단 한번의 인사말도, 단 한번의 악수도
, 단 한번의 관심
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가게에서 잔돈을 받을 때조차 내민 내 손
바닥이 아닌 탁자 위에 동전을 툭 던져 놓고 손을 거두는 모습에 참으로 마
음이 상했다.
나 역시 그들의 종교적 열정에 아무런 관심도, 호기심도, 영향도, 감동도 받
지 않았다. 그들의 소위 ‘경건’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느꼈다. 그
들을 보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보는듯 싶어 오히려 마음이 씁쓸하
고 답답했다.
그러나 나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그것은 내가 그들 때문에 받은 문
화 충격이 아니었다. 그들 속에서 나 자신의 사역을 보도록 눈에 비늘을 떨
어지게 만드신 주님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지역 사회의 이방인(?)이었
던 내가 그들을 미래의 신자들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눈으로 우리 교회의 십자가, 우리의 메시
지, 우리의 신앙적 열정, 우리의 양육 프로그램, 우리 공동체의 교제에 대
해 관찰해 보게 되었다. 나는 유대 종교인들에 대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
는 듯이 교회 주변의 미래 신자들에게 우리 교회가 얼마나 상관이 있게 느껴
질까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 신학의 정통성, 우리의 복음에 대한 열정, 우리의 전도에 대한 헌신 등
등 우리에게 그렇게 친숙하고 절대적인 명제들이 저들에게 얼마나 간절한 주
제로 와 닿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 “그건 네 생각이지!”라고
비아냥하는 대사가 떠올랐다. 내가 절망스럽게 느낀 탄식은 그들에게 와닿
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 깊이 뼈아픈 반성으로 느끼듯, 흔히 말하는 패러다
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이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 양육, 교
제는 성장 했지만, 전도와 봉사는 부족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우리는 단
지 봉사를 개인의 성화 문제로만 다루고 교회의 사명으로 실천하는데 실패했
던 것이다. 봉사를 전도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으며 단지 전도의 미끼로 이
용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한국교회의 목회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목회의 목적이 하나님
의 왕국 개념이 아니라 내 교회 성장을 중심으로 실행되었던 것이다. 그 결
과 봉사를 교회 내의 사역으로 제한했으며, 전도와 봉사를 분리하는 이분법
적 이해를 하고 있었으며, 영혼 구원과
사회 참여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
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를 우리의 일상 생활에 나타나는 삶이 아닌 제한된 시간
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나 프로그램으로 여기게 되었다. 전도가 특별한 사람,
특별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전락된 것이다. 전도가 농사가 아닌 장
사 결과에 집착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신자에게 들리지 않는 전도가 된 것이
다.
그동안 우리는 지역 사회에 대한 긍휼과 관심이 적고, 교구 애착심이 적었으
며실질적 필요가 있는 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봉사의 인적 물적 자원을 우선
순위에 두지 않고 맨 마지막에 구색 맞추기를 위해 배치했을 뿐이다. 그리
고 작은 예수를 교회라고 하는 상자의 틀 안에서(in), 교회의 틀 내부를 위
하여(for), 교회의 틀을 통하여(through) 세우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한 마
디로 씨 뿌리는 일에는 인색하면서 많은 수확을 기대했고 불신자 전도보다
는 수평 이동 신자로 인한 교회의 성장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런 현상으로부터 교회가 탈피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또는 교
회 공동체적으로 실제적인 사랑의 섬김을 통해 지역사회를 축복하는 샘의
근
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행사와 프로그램이 아닌 삶의 자태로 나타
내야 하며 복음을 말하기보다는 복음을 실제적인 사랑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는 내부지향적이 아니라 외부지향적인 우선순위를 가져야 한다.
전도는 오게 하는 것과 찾아가는 것 사이에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리고 한
교회의 크기는 건물이나 성도 수, 예산 액수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에 대한 영향력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섬김과 전도는 신자의 삶이어야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외부 지향적으로 흘러 넘치게 하는 비전
을 계발하며, 섬김과 전도를 각 개인의 생활화로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