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악령’과 성령의 목회
손성은_삼일교회
목회의 이상은 무엇일까? 목회는 그리스도인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성
령으로 믿게 되어 살아나게 되었다면 계속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그렇게 권면했다(갈 5:25). 그렇다면
이상적인 목회도 성령으로 행하는 목회라고 해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살아야
‘성령의 목회’는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인 삶에 관심을 갖는 것만을 말하
지 않는다. 성령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고 그
의를 이루기 위하여 힘쓰되, 그것이 인간적인 애씀과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을 개인의 내면 속에 내주하시는 분으로서만 이해해서도 안 된다.
목회의 대상인 교회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엡
1:23)이라면 바로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 충만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 영의 충만은
나의 내면만의 충만이 아니라 온 세상, 온 우주의 충만이
다.
도스또옙스키의 ‘악령’이란 소설은 어떤 인격적 실체로서의 ‘악한 영’
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인격적 실체인 ‘악령’이 조직적으로 혹은 체계
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이데올로기를 고발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시대를 풍미
하였던 무신론의 혁명 사상을 ‘악령’으로 본 셈이다.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이 없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주
의자들의 ‘악령’에 지배된 상태를 냉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절대자 하나님
에 대하여 절대적 자유로 반항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자살하는 것이라고 역
설하는 ‘악령’의 정신을 고발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성령의 목회’란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지향하
는 목회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순종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힘, 목사 개인의 어떤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순
종할 수 있도록 감화시키고 감동시켜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순종케 하시기 때문에 순종하고, 순종하기 때문에 더 큰 순종에 이르게 된
다.
문제는 순종한다고 하면서 영적 허영
과 명예에 눈이 가려 자기의 감정, 욕
구, 필요에 따라 살면서 그것을 ‘성령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
이는 것에 있다. ‘성령’에 순종한다고 하면서 ‘악령’를 좇는 경우가 그
렇다.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활동하기도 한다.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져야 할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
와 그 의로 날마다 자신을 비춰보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그
기준이다. 하지만 그 말씀을 따른다 함이 스스로를 또한 속이는 방편이 된다
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말씀을 따른다 하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
만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방식으로만 순종하는 나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말씀과 성령, 이 두 방면을 언제나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말씀
은 성령을 품고 있고 성령은 언제나 말씀에 근거한다. 성령의 목회는 말씀
의 목회이다. 말씀의 목회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말씀이 가르치는 ‘거룩’이 없이는 목회가 불가능한 줄 알 때 비로소 성령
의 목회가 시작된다. 이후에 나타날 목회의 양상은 오직 성령님께서 주관하
여 이
뤄 나가신다.
말씀과 경건 없이는 목회 불가능해
어떻게 이루시든 자신을 맡기는 것, 자신의 거룩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렇
게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경건을 연습하여야 한다.
목회한다면서 ‘악령’에게 기만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