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위험
구본형_충청노회장, 반석교회 목사
옛날에 들은 이야기이다 외국선교사들이 말하기를 “한국에는 기독교와 예수
교가 싸운다”고 했다 한다.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 예수교성결교회
와 기독교성결교회, 예수교하나님의성회와 기독교하나님의성회 등등 더 있겠
지만 간단히 떠오르는 이름들만 해도 이렇다 신학과 교리와 행정을 달리 하
면서 나온 이름들이겠지만 “기독교와 예수교가 싸운다”니 얼마나 어이없
는 이야기이며 웃지 못할 관찰인가?
명칭만으로도 갈등 부각돼
최근 혹은 이전의 교계의 신앙형태를 살펴보면 또한 웃지 못할 이런 구분이
있다. 말씀을 강조한다고 하면서 성령을 무시한다든지 성령을 강조한다고 하
면서 말씀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표현은 이렇다. “말씀, 말
씀 강조하면서 부흥하는 교회 보았느냐?” 이는 소위 성령 운동한다는 사람
들의 주장이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 충만 등의 단어가 나오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마치 신비주의나 은사주의자를 보는 듯한 자세
역시 모두 극단적이
다.
이런 형편을 보면 마치 말씀과 성령 혹은 말씀주의자와 성령주의자가 나뉘어
서 싸우는 것 같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
는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 당시 배경
하에서 주신 말씀이지만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닐까?
어떤 분은 신비주의에도(좌) 이성주의에도(우) 치우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라고 했다.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듣고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어
보인다. 신앙의 두 극단은 한쪽은 신비주의요(좌측) 한쪽은 이성주의다(우
측). 그렇다면 중간노선, 요즘 정치계에서 말하는 중도노선을 걷자는 말인
가? 그것은 아니다. 또한 말씀을 강조하면 이성주의자가 되라는 말도 아니
다.
신앙에는 신비도 이성도 모두 정당한 위치가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붙잡
고 ‘주의’(ism)로 나가는 것은 확실히 정도를 벗어난 극단으로 가는 것이
다.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 칼빈은 “성령은 말씀에 대한 우
리의 확실성의 원인이고 말씀은 성령에 대한 우리의 확실성의 근거이다. 성
령이 없이는 우리는 말씀의 빛
을 상실하게 되고 말씀이 없이는 우리는 성령
의 조명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말씀을 낮추고 성령을 높인다고 하는 신령주의자들을 경계하고 반면에 성령
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말씀과 더불어 말씀을 통하여 일하기를 기뻐하
시는 성령님의 주권을 세우는 이 관계를 잘 포착해야 하겠다. 워필드는 칼빈
을 가리켜 종종 ‘성령의 신학자’라 불렀다 하니 우리에게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주는가?
성령 없이 말씀을 내세우는 것이 불합리한 것처럼 말씀 없이 성령을 자랑하
는 것 또한 터무니없는 일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령의 자유를 강조하며
‘말씀과 더불어’라는 말로 성령의 주권을 표현해 왔다. 또한 성령은 말씀
을 통하여 말씀에 의해 일하기를 기뻐하신다고 말함으로써 말씀의 권위를 표
현해 왔다. 이 관계는 분리 될 수 없다.
종교개혁당시 성령을 말씀으로부터 분리시킨 로마교회나 말씀을 낮추고 성령
을 높인 신령주의자들 외에도 재세례파나 방종주의 모두가 그릇 갔거나 극단
주의자들이 되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이런 경향은 없는가?
말씀과 성령 늘 함께 있어
“너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이 말
씀을 오늘 우리시대엔 무슨 의
미로 주셨을까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