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유일한 왕은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충성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국가 권력이나 물질주의자나 문화주의자들의 요구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교회는 더 높은 권세를 바라보고 있기에 이것은 앞에 열거한 세속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불쾌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삶과 가르침은 세상에서 높이 존중받고 숭배 받는 대상을 정죄하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할 당시 국가는 절대왕조의 시대였다. 그 시대의 국가 권세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권세와 동일시하던 시대였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종속관계였고, 이 시대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은혜수단은 찾아 볼 수 없는 시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깨어 있는 기독교인들은 절대왕조에 대해 복종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신앙문답으로 드러냈다. 그것이 바로 대소요리문답 제1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의 제일 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제일 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떤가? 교회에 경제논리의 가치관이 자리 잡은지 오래이다. 교회는 경제논리 가치관에 종속되다시피 되어 버렸다. 경제논리에 의해 교회가 성장하고 못하고를 판단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가 폐쇄 되는 원인과 결과 역시 물질 때문이라고 한다.
물질이 없으면 복음도 전할 수 없고 교회도 세울 수 없고 선교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질이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마다 주님의 이름을 내세워 물질 축복을 남발하고 있다. 이렇게 교회가 교회의 본의를 잃어가다 보니 역으로 이런 교회를 향하여 세상으로부터 비판과 질시를 받고 있다.
작금 교회의 눈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절대 하나님께 순종인가? 여기서 “창조자로부터 미혹하고 피조물을 향하게 하는 모든 사람들은 거짓 목자”라고 지적하는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의 외침은 지금도 한국교회에 대해서는 유효한 지적이다.
교회의 본의를 드러내야 하는데 길이 안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칼빈이 말했듯이 “뱃사공이 뱃길을 보지 못하나 별을 보면서 확실한 항구에 도달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그의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목표를 주시함으로써 길을 발견하기를 바랄 수 있다.” 그것이 대소요리문답이다.
그렇기에 2014년에 교회는 부지런히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렇게 좋은 신앙유산을 선진들로부터 받고도 땅에 묻어두고 다른 것들을 좇는다면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는지 두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