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해야 하는 신자들의 삶
조선 정도 때의 문신이었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강진으로 유배를 갔었다. 그곳에서 후일에 다산의 제자가 된 황 상은 어느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다산은 열다섯 살인 내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치심을 내리면서 늘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느니라. 너도 이렇게 하거라’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네.” 세상에서도 깨어 있는 사람들은 이처럼 부지런히 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신자들이 게으르다는 것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신자들의 삶이 드러나야 하는 곳은 타락한 이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신자들로서 수고를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이 신자들의 삶이다. 그런데 신자들로서의 삶 또한 만만치가 않다. 세상에 대해서도 그렇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신자들의 삶, 즉 열매가 별 성과가 없기 일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악한 시대를 말하고, 환경을 말하고, 사람을 말하면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나아가 ‘해도 안 된다’는 논리를 펴고 더 이상 안 되는 것에 대해 어리석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변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인으로서 자신이 할 일을 면제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것, 즉 여흥과 취미 생활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때로는 삶의 수고로 인하여 몸이 상할 수도 있다. 사실 몸이나 정신은 적당한 휴식 없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 생활이 하늘의 직무에 대한 열심을 약화시켜서 우리 신자들의 삶, 그 높은 부르심의 삶에 온전히 드려져야 하는 귀중한 시간이 낭비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자기를 살펴야 할 것이다.
혹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철회가 된 것은 아니다. 나의 건강보다도, 또는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순종하는 것이 신자들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자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떠날 때까지이다. 면제가 없다. 이 생명 다할 때까지가 신자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기간이다. 그리고 그 삶은 수고해야만 하고 그 수고는 부지런해야 할 수 있다. 그것이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