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회복해야 할 거룩한 분노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세상이 온통 부정부패로 가득하다. 인사부정, 선거부정, 통계부정, 건축부정, 식품부정, 의료부정, 입시부정, 심사부정 등 나열하자면 밑도 끝도 한도 없다.
분야별로도 정치, 문화, 경제, 교육, 연예, 스포츠, 언론, 사법, 종교 등 어느 한 분야도 예외 없다. 문제는 교회도 예외가 아니란 점이다. 부정부패라는 말은 ‘바르지 못하면 썩기 마련’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교회가 부패했다면 그건 바름에 대한 추구를 버렸기 때문이다.
바름과 왜곡, 진실과 거짓, 명분과 실리, 사랑과 욕망은 상충되는 가치 개념이다. 양자를 적당히 취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어느 한쪽이든 1%만 기울어지면 상대가치는 곧바로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오늘날 교회의 유일 최고의 목표가 ‘구별됨’이 아닌 ‘성공’이라면 바름에 대한 추구는 2선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교회는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 그 존재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거나 복음의 진정성이 왜곡될 때 교회와 성도는 분노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한 분노, 그게 곧 거룩한 분노이다. 그것은 부정과의 현재진행형 싸움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누군가 거룩한 분노를 발한다면 아직도 부패하지 않았다는 지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 거룩한 분노를 찾을 수 없다는 게 심각한 문제다.
분노는 나쁜 것이고 덮어주는 것이 은혜라고 누가 말했나? 정녕 거룩한 분노보다 야합의 비굴한 웃음이 낫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의 약함은 덮어줘야 하지만 죄와 유혹과 비리와 부패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된다. 어린아이에게 매가 없으면 자녀를 망치는 것처럼, 교회에 거룩한 분노가 없다면 그때부터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세상의 부패를 걱정하기 전에 스스로의 무너짐을 걱정해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부패 없는 세상을 만들거나 부패한 사회를 규탄하는 데 있지 않고 교회 스스로 부패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남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존재 가치는 강함에 있지 않고 구별됨에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바름에 대한 목마름으로 거룩한 분노를 회복해야 한다. 부정과의 싸움이 곧 부패를 막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성공만 향해 치달리는 성도들과 젊은이들에게 그보다 중요한 바름을 가르치자. 그들이 거룩한 분노를 배울 때 비로소 부패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교회는 제 몫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