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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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 요한은 목이 잘리는 참형으로 순교를 했다. 그리스도를 앞서 와서 그
분 사역을 준비하는 일을 마치고 이렇게 죽었다. 정치와 종교의 협공에 바
른 소리하다가 세상나라 말로 요절한 것이다. 본격으로 사명 수행한 지 여
섯 달쯤 지났을 때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사에서는 중세교회가 부패한 기간을 AD 500년에서 1500년까
지 잡는다. 이는 무려 1000년의 기간이다. 부패한 교권이 어떤 무자비한 일
을 자행했는지는 교회사를 조금만 들춰보면 누구나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이 캄캄한 1000년 동안 교회는 십자군운동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일과 세상 정
치와 야합하여 온 누리를 짓밟았다. 인권과 과학, 문화를 철저하게 막아버
린 일이 교회 밖에서 벌어지게 했다. 한 마디로 성경이 없는 시대, 너무도 
타락하여 그만 입이 벌어지는 어안이 벙벙해지는 거짓 일꾼들이 주름잡던 때
였다. 

십자가는 널렸지만 십자가가 없었고, 사랑을 외치건만 미움과 살인뿐이었
다. 교회는 다른 구원과 미신의 소굴로 
전락하여, 배교에 앞장선 적그리스도
의 만행만 있었을 뿐이다.

중세교회가 빠졌던 ‘행위구원, 교권주의, 이성주의’를 반대하고, 에덴에
서 쫓겨난 뒤부터 희미하나마 계속되던 교회개혁을 역사상 1517년 10월 마지
막 날에 마르틴 루터를 필두로 이곳 저곳에서 부패한 것들을 뜯어고치는 일
이 시작되었다. 이 날은 오늘날도 종교개혁을 기리는 날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 만인제사장, 오직 성경!”이라는 3대 주장을 기
치로 높이 올렸다. 마침 그 때가 이 가을에 성큼 다가온다. 그 때부터 490년
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은 중세 천년의 암흑기보다 그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2의 교회 개혁을 주시던가, 아니면 어서 예수님이 오시던
가 바라게 된다. 

배교하는 때의 모습은 구약에서 선지자의 글에 너무도 잘 나타나있다. 특히 
교회지도자들의 타락상을 구구절절 휘몰아친다. 오늘날 이 예언하신 대로 이
루어지고 있다. 무섭다. 예수님 때도 바리새인이라는 성경에 정통한 민족주
의자요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를 자처하던 그들이 예수님을 전
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
한다. 하긴 광야에서 이스라엘 교
회는 언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한 번이라도 드렸던가?

참된 교회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 중에 권징이 있다. 이것은 바르게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눈에 보이는 말씀인 바른 성례
를 시행하는 것도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지 여부를 
살피고 강화하려고 성례가 있고, 더욱이 바른 말씀선포와 바른 성례 시행을 
통하여 교회가 굳건히 서가도록 이 둘을 위하여 교회에 권징을 주셨다. 이 
세 가지로써 바른 교회의 징표를 삼는다.

이 세 가지 표지는 사실 한 가지이다.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는 일이다. 심
은 대로 거두기에 강단에서 교사가 이것을 게을리하거나 그릇되이 하면 성례
나 권징은 엉터리로 전락한다. 권징을 중심으로 교회정치가 여기에 속한다. 
물론 목사에 대한 규칙도 포함된다. 장로교회 또는 개혁교회라 한다면 목사 
수준이 보통이 아니라야 한다. 

1647에 완성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보라! 360년 전 장로교회 모습이
다. 목사 세우는 것에 관련한 것이라든지, 특히 예배모범이라든지, 교회정
치 부분이라든지 보면 지금과 
견주어 문화와 시대의 차이를 빼고라도 그 본
질은 살아 숨쉬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교회의 표지들로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가려야 한다. 신앙고백을 앞
세워 바른 교사와 정치를 굳건하게 세워야 한다. 이 두 부분에서 현대교회
는 대부분 자격미달이다. 아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지를 못한다. 
이만큼 썩었고 기본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소수의 적은 무리만이 그 나라
를 바라보면서 바르게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요즘은 진리보다는 다수를 따른다. 다수보다는 소수의 입김이 더 세다. 완전
히 뒤집어진 모습이다. 소수보다는 다수가, 다수보다는 진리를 따라야 한
다. 나이 어린 목사가 아버지 같은 목사에게 반말이다. 바른 말을 해도 이른
바 교세가 약하면 무시한다. 이런 정도는 빙산의 일각이다. 루터와 칼빈 같
은 개혁자를 고대해 본다.

우리 모두 교회와 신앙과 성경과 정치의 기본을 객관적으로 심도 있게 정리
하면 좋겠다. 누구를 비판하기보다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그네 생활을 뜻 있
게 지내야 한다. 남자다워야 하고 강건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칼빈이나 
바울을 만나고 싶다. 초심으로 돌아가 십자가 
앞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
송하며, 성경을 나누고 싶다.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며 여섯 달을 외치다 순교한 세례 요한처
럼 사는 지도자들이 우리 시대에는 진정 없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