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때문에 ‘개혁’을 외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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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개혁’을 외치는가? 

옛말에 ‘以五十步 笑百步’(오십보 도망간 병사가 1백보 도망간 병사를 비
웃는다)는 말이 있다. 오십보나 백보나 도망간 것은 꼭 같다는 점을 강조하
기 위한 말일 것이다. 물론 비겁하게 도망한 일에 오십보와 백보가 차이 없
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누가 보아도 오십보나 백보는 비겁한 일임에 틀림없다. 반면 오십보는 상대
적으로 백보보다 덜 비겁한 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십보가 백
보보다 개혁을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더 위험한 요소일 수 있다. 누구나 잘못
이라고 볼 수 있는 문제보다는 조금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 문제가 우리를 
더 유혹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가고, 한 발 덜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그리 심각하거나 위험
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잘못되거나 빗나간 것보
다 우리를 더 위험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긴장을 풀게 
하고 쉽게 허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깔뱅 선생의 ‘기독교강요’
에 이런 표현이 있다. “로마교회는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교회에 유익하다고 생각되면 도입하고, 루터교회는 말
씀에 금한 것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입장이며, 개혁교회는 말씀이 허용한 것
만 받아들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모습은 어디에 서 있는가? 
진정한 개혁교회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어떤 신학자는 현재의 상황을 ‘마이너스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오늘날 
‘너와 나 중 누가 의인이며 누가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나쁘고 
더 악하냐’는 문제에 치중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 악하고 다 잘못을 
가졌지만 그중에 누가 덜 악하고 덜 잘못했느냐를 가리자는 말처럼 보인다. 
바로 여기에 사건의 본말이 뒤집어지고 거짓이 사실을 구축(驅逐)하는 틈이 
발생하게 된다.

조금 틀린 것 가지고 무슨 호들갑을 떠느냐고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비겁한 행동이다. 이것은 개혁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아주 비열한 소리와 다
를 바 없다. 조금 틀린 것일지라도 과감하게 척결하는 자세가 없다면 그곳에
는 더이상 개혁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