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 성탄절에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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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성탄절에 생각한다
김재성교수

성탄절과 12월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성탄절을 기대하
면서도 또 다시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상념을 지울 수 없다. 컴퓨터 오작동
의 위험을 경고하는 전세계 매스컴들 호들갑에 묶여서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밀레니엄 버그가 발생하여 지구상에 큰 대란이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
면서 맞이했던 새 천년! 그래서 새해 꼭두새벽부터 날자 변경 선에 해당하는 
남태평양의 어느 마을 풍경을 밤을 지새우며 지켜보아야 했던 금년 초 첫 새
벽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그렇게 시작한 한 해가 분주한 가운데 빠르게 지
나가더니, 이제 12월의 끝자락에서 걸려있다. 너무나 숨가쁘고 힘들었던 한 
해였다. 차분히 지나간 일을 돌아보면서, 성탄절에 즈음하여 생각해야 할 일
들이 너무나 많다.

우선 금년도 성탄절은 어떻게 맞이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 
상업화되는 성탄절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한다. 요셉과 마리아가 맞이했던 첫 
성탄절은 12월이 아니었었다. 그 당
시에는 오늘과 같은 달력이 어디에도 없었
다. 초대교회시대에는 1월 6일, 금식주간의 하나였던 날을 주현절이라고 지켰
었다. 폴리캅이나, 오리겐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등이 남긴 기록들
에 보면 그 어느 날이 과연 성찬절인지 정확하지가 않다. 현재 서양 교회가 
지키는 12월 25일은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 하게된 이후 336년부터
다. 아르메니아 교회들은 1월 6일을 주장하면서, 동방 박사들이 경배한 날이
기에 이 날을 지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로, 오늘의 한국 사회는 너무나 어둡고 침울하다. 어느 구석을 살펴보아
도 희망과 즐거움이 별로 없다.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만하며, 인류 문화의 증
진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부패의 사슬은 끊이지 않고 서
민의 가슴에 소외감을 안겨주고 있다. 폭력이 지배하는 학교의 교실이나, 생
명윤리가 위협을 받고 있는 시대에 처하여 기독교 교회의 신앙과 가치관은 송
두리채 위협을 받을 처지에 놓여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로마 통치하의 유
대 사회도 역시 세금과 부역의 공포로 인해서 소망이 없던 날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탄생은 이 땅에 참된 기
쁨이요, 진정한 평화와 감사의 날이
다. 목자들이 즐거워하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기쁘게 축하하던 성탄절은 
이 세상에 자신의 몸을 주시고자 낮은 자리에 임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생명이 경시되고 있는 시대에 예수님은 지금 오셔서 무엇을 말씀하
실 것인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벌레같인 많은 인간들을 위해서 구원의 약
속을 이루시고, 자신을 희생 제물으로 바치신 분은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시는
가? 무엇보다도 생명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실 것이다.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게 생각되는 일들이 
많았다. 오늘날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타락하고 퇴색하고 말았다. 하나님
의 사랑은 아가페이다. 그 사랑은 너무나 숭고하고 갸륵한 사랑이다. 돈 몇 
푼을 주면 언제든지 살 수 있는 러브 호텔의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사
회의 곳곳에서는 원조교제나, 미성년자 매춘이나, 유흥업소의 번창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다.

젊은이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에 대해서 식상해 할지 모른다. 그리고 다
시금 복음이라는 새로운 굴레에 묶이지 않으려고 흔들고, 마시고, 소리를 지
r
르면서 취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불행한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비로소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늦기 전에 사랑의 가치와 사
랑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한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
게 진정한 사랑을 예수님에게서 찾아보라고 확신 있게 전파하는 기회로 삼기
를 소망한다. 성탄절은 가장 고상한 사랑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나타난 날이
다.

셋째로, 가난한 나라가 이처럼 살만큼 되었지만, 아직도 이북을 생각하면 괴
로운 마음으로 식탁에 앉게된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철조망 건너편 
곳곳에서는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배고픔과 아픔에 사무치는 동족들이 
있다. 이순옥 집사가 쓴 「꼬리없는 짐승」이나, 한민족 공동체 운동을 하면
서 탈북자들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분들이 최근에 내놓은 보고서들을 읽어보
면 남한 교회의 호강과 사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성도 여러분, 당신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다는 모르리라. 우
리 북한의 메마른 인생들을 보면서 당신들은 행복을 다시금 새롭게 느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대통
령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어서, 그나마 작은 위안
으로 삼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추구해오고 있는 남북의 만남 뒤에는 여전
히 북쪽의 어둡고 참담한 실상이 감추어져 있다. 가슴아픈 이들을 생각하면
서 성탄의 축복이 그들에게 어떻게든 전달 될 수 있도록 작은 사랑이라도 모
아야 할 것이다. 이 추운 날씨에 더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중국과는 다른 옷 
차림 때문에 죽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헌 옷이라도 모아야만 할 때이다.

어느 하늘 아래 살든지, 하나님의 평안으로 위로 받지 못하는 인생의 날은 허
무하고 공허하다. 해 아래 새 것이 없기에 인생은 또 다시 내년에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것이다. 아무리 가르치고 도와주어도 허망한 인생들은 후회
에 차게 될 것이다. 성탄절에 이런 저런 아픔들을 생각해보니, 오직 한 마디
밖에 없다. ‘한국 교회여! 이제 회개하고 어린 아기 예수님 앞에 영광과 경
배를 돌리고, 겸손히 회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