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 씨 ‘노자론’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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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씨 ‘노자론’의 허상
김영재교수

요즘 우리 나라에 동양사상이야말로 최고라는 사람의 강좌가 교육방송 교
양강좌라는 이름으로 안방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과 몇 주일 전, 지
난 해 말, 세계인류는 온갖 새밀레니엄 맞이 행사로 불안과 흥분이 교차하
였는데, 이제는 다 잊어버린 듯이 보이고, 더 솔직히 말하면 극성스럽게도
자극을 주는 김씨의 주장에 홀린 듯 넋을 잃고 있는 듯이 보인다.
먼저, 한국신학대학에서 공부하였다는 김씨의 강좌에 자주 등장하는 비교
종교학적 기독교 고찰이 대단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김씨는 전형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일부를 맛보고서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전체 진리 체계인양,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아는 듯이 비판을 일삼고 있다.
김씨의 기독교 비판은 완전히 일그러진 기독교관에서 한발짝도 더 앞서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약간의 신학을 맛보는 정도에 머물렀던 그가 마치 기
독교의 전문가인양, 자신의 초 종교적 천재성을 과시하는 듯이 보인다.
김씨는 
왜 자신이 기독교를 버렸는가를 설명하면서, 기독교의 핵심은 제쳐
두고, 자신의 피상적 비판을 곁들이고 있으니, 신학이나 성경을 전혀 모르
는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기독교관을 심어주는 것이요, 기독교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다른 종교인들에게는 쾌감을 안겨주게 될까 걱정스럽다. 김씨의
강좌에 소개되는 예수, 세례 요한, 사도 바울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신학자
들의 비신화화와 문서비평을 거친 후에 다시 각색되어 나타나는 인간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전공하지 않는 분야를 다룰 때에는 겸손하고, 조심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는 기독교와 신학을 모두 다 우롱하고 비웃고 있
는데, 그가 과연 어떻게 이를 감당할 것인지 걱정스럽다.
언젠가 그는 차범근 감독이 국가 대표팀을 맡아서 지도할 때에, 공개석상
에서 기도하는 것을 언론에 비난한 바 있다. 그의 기고만장한 입장을 이미
알고 있는 바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보다는 전
세계에 더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진리와 신앙에 대해서 그토록 함부
로 말해도 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왜 우리가 이제 와서 다시 노자사상으로 돌
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김씨 자신이 접한 일부 선생
들이야말로 대가들이니까, 그밖에 사람들이 하는 시시한 소리들은 집어치
우고, 오로지 자신이 접한 바 있고, 큰 가르침을 얻은 바 있는 바로 그 탁
월한 사상인 노자로 돌아가야만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는 것이
다. 정말로 노자가 위대한 사상체계였고, 그토록 능력있는 가르침이라고 한
다면 왜 중국인들은 지나온 역사 속에서 노자를 버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
들을 죽이고, 서로 싸웠으며, 아직도 이념에 사로잡혀 있는가? 아직도 채
민주화를 이루지 못하고, 종교자유마저도 없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노자가 그렇게 위대했으면, 왜 지금까지 중국은 한번도 제대로 노자를 따
르지 않는가 말이다. 저희 나라에서도 아무런 업적을 낳지 못한 사상을 가
져다가 우리가 이제 와서 그런 사람의 사상을 뒤따라 가야만 한다는 것인
가?
노자는 개인적으로 그리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다. 이름마저도
그의 본명이 아니다. 원래 ‘이이’(李珥)가 본명인데, 아버지는 일찍 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어려서 돌아가셔서 노씨 
댁에 가서 양자로 자랐다. 그리
고 짧은 결혼생활도 비극적으로 마쳐야만 했으며, 관직마저도 한동안 왕의
도서책임자로 있었을 뿐이다. 그는 낙향하여 ‘도덕경’을 남기고 교육자
로 일생을 마쳤다. 일평생 별로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온 세상
의 사상을 모조리 터득한 사람도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김씨의 역사이해에 문제가 많다. 그는 종종 중국사대주의자처럼 거
대한 중국을 칭송한다. 자신의 중국체류에서 얻은 경험을 자랑하는 듯하면
서도, 역사인식에는 문제가 많다. 그는 한 강좌에서 모택동의 팔로군을 칭
찬하였다. 그가 공산주의를 칭송했다고 무조건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러나 장개석 군대의 비도덕성 못지 않게, 팔로군의 문제점 또한 적지 않으
며, 그 이후로 그들의 변신과 만행은 또 어떻게 볼 것인가? 1990년 천안문
사태 이후로 중국 젊은이들이 분노 가운데 또는 좌절 가운데서 벗어버리고
싶은 체제가 모택동의 공산주의 중국군대이다. 중국의 민주주의를 말살하
고 아직도 일당독재의 나라로 정치적인 면에서는 야만성과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팔로군이 정말로 훌륭하
다고 칭
찬하는 우를 범하기까지 하고 있다.
왜 우리는 그런 강좌를 무심코 들어주어야만 하는가? 인기가 있다는 것으
로서 묵인될 것인가? 그의 강좌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엄청나게
기분이 나쁘다. 철학이 가져다 주는 지혜와 번득이는 위트와 일상에서 듣
지 못한 교훈들을 얻고 싶은데, 전혀 그런 것을 찾을 수 없다. 그의 발언은
매우 위험스러울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일본×은 모두 다 그렇다’고 아
주 나쁘게 말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일본인 스승 아무개씨로부터 엄청난
것을 배웠다고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극에서 극으로 전횡하는 언사들은
과연 이분이 학문의 보편성과 공정성을 조망할 줄 아는 지성인인가? 하고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철학자들은 대부분 프란시스 베이컨이 주장했던 ‘동굴의 우상’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개인의 성향, 개인이 접한 교제의 범위, 책과 존중하는 권
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상이나 인물을 전공하면, 그 분야에
만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고 맹신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이야말로,
‘극장의 우상’에 빠져 있다. 잘못된 이론으로 빠져들면 도무지 헤어나올
r
방법이 없다.
신구약 성경을 통털어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병폐가 바로 그 우상숭배였
었다. 그런 우상에서 지성은 자유로워야 한다. 깨끗하고 순수하면, 순정한
지식의 원리와 방법을 가져야만 한다. 김씨는 더 이상 하나님은 없고, 오직
자연, 산과 하늘만 있다고 주장하는데, 사람을 속이는 그의 말솜씨의 ‘동
굴’에서 속히 벗어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