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 한국’을 생각하며
< 민현필 목사, 부천중동교회 청년부 담당 >
“어떤 손실을 감당하고서라도 이웃에 대한 인애와 사랑 실천해야”
마태복음 18장 후반부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에 관한 비유를 보면서 잠깐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해 보니 이렇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다. 그리고 1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다.
오늘날 일꾼의 하루 품삯은 대략 70,000원 가량이다. 따라서 1만 달란트는 4조 2천억 원에 상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반면, 1백 데나리온은 대략 환산하면 7백만 원 정도가 된다.
그런데 보통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일만’이라는 수치는 ‘셀 수 없거나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형용사가 사용되고 있다. 즉 우리말로 쉽게 번역하면 ‘억만 금’의 빚을 탕감 받은 것이다. 그런 사람이 1백 데나리온, 곧 7백만 원 정도 빚진 사람에게 빚을 독촉하는 행위는 인색하다 못해 가히 사악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이 비유를 주신 맥락은 죄를 범한 형제를 교회가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신 부분이다. 그 말씀 끝에 베드로가 물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주님은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개념이었다. 이와 관련해 70이라는 숫자는 다니엘서 9장에 70주로 언급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의 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적 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간기 시대까지도 영성화 되어 이스라엘 민중들의 삶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레위기 25장의 희년을 떠올리게 만드는 숫자이기도 하다.
용서라는 주제를 다루는 문맥을 희년 사상과 연결시키는 것은 결코 어색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희년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레 25:10)는 말씀에서 ‘자유'(놓임, 풀어줌, 내보냄)라는 히브리어 단어 ‘데로르'(deror)를 70인역에서는 명사형 ‘아페신’으로 번역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사야 61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종 메시아가 오셔서 행하실 사명을 묘사하기를, ‘포로된 자에게 자유'(아페신)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주님은 자신의 공생애 첫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바로 이 이사야 61장을 찾아 읽으시고는 ‘이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즉, 자신이 바로 구약 시대에 레위기를 통하여 명하시고,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로 그 종말의 희년을 성취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복음의 본질은 사람을 자유케 하는데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진리가 갖는 총체적 성격으로 인해 그것은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경제적, 사회적 측면까지도 포괄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눌리고 포로된 인생들이 본래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며, 살 길을 얻도록 만드는 것까지를 포괄한다.
나아가 희년의 복음은 정치, 경제적 어젠다를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죄와 경제적 속박으로 인해 눌려 있던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성을 회복하고, 상호 의존적인 공동체적 삶의 질서를 구축하며,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경제적 손실을 감당하고서라도 이웃에 대한 인애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희년의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다. 공평과 정의가 먼저이며, 먹고 마시는 문제는 그 다음이다.
주님은 친히 가르치신 기도를 통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줌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빚 탕감을 받은 자임을 실체적으로 경험하고 드러낸다’는 영적 원리를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가 살아내는 그대로가 곧 복음 그 자체이며, 나무는 그 열매로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