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기독교단이 ‘대동아공영권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대한 평가
< 김산덕 목사, 일본 후쿠로이아이노메구미교회 >
<사진설명 / 황기2천6백봉축전국기독교신도대회의 장면>
1944년 3월 26일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기독교단」(이하 교단)은 그들이 말하는 대동아공영권에 속한 이웃 나라의 교회들에게 소위 ‘일본기독교단이 대동아공영권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보냈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용어는 1940년 일본 내각에서 결정된 것으로, 서양 특히 영국과 미국의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해방시켜서, 일본을 맹주로 공존공생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건설하려는 음모에 기인한 것이다.
광복 69주년을 맞이하여 이 글에서는 당시 일본기독교단이 저지른 악행을 돌아보며 우리 교회가 마땅히 추구할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1. 간략한 일본교회 역사
이 서한은 서론과 함께 모두 4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은 황군에 의해서 적성국가(특히, 영국과 미국)로부터 대동아의 해방을 말하며, 제2장은 신의 나라 일본만이 대동아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제3장은 교회는 종교보국으로(宗敎報國: 종교로 나라에 충성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 천황의 넓은 마음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것이 교회의 길이라고 호소하며, 제4장에서는 대동아공영권 수립에 저항하는 자를 분열주의자로 규정한다.
그리스도교의 교회로서 「일본기독교단」이 어떻게 이런 편지를 발송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면, 교단이 설립되게 된 배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에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최초로 건설된 것은 1872년 3월 10일 ‘요코하마공회’(橫浜公會, 현재 橫浜海岸敎會)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일본기독공회」였다.
이 공회시대는 일본의 개혁파 교회와 장로파 교회에 속한 아홉 교회가 연합한 「일본기독일치교회」(1877.10.3)로 이어졌고, 나아가 선교사들을 배제하고 가능한 한 일본인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기독교회」(1890-1941) 시대가 열렸다. 그러던 것이 1941년 6월 24일 「일본기독교단」이 설립되어 지금에 이른다.
전후에 각 교파는 자신들의 교파(교회)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교단으로부터 이탈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이 교단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 현재 일본에서 규모적으로 가장 큰 개신교 교단(교파) 중의 하나는 「일본기독교단」(또는 일본그리스도교단)이다.
교단이 설립된 시기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이때의 역사적 상황은 일본제국이 대동아공영권의 야욕으로 가장 불타오른 때였다.
2. 이 서한을 발송하게 된 배경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은 1894-1895년의 청일전쟁, 1904-1905년의 러일전쟁, 1910년의 한일병탄,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등으로 이어지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천업익찬”(天業翼贊: 천황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받들어 도우는 것)을 이루어가는 한창 때였다.
1938년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정부가 통제 운용한다는 내용의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 제정과 함께, 1939년 4월 8일에 「종교단체법」을 제정했다.
이 종교단체법은 대아를 위해서 소아를 죽이는 것을 원리아래 국가에 보조를 맞추는 종교는 보호, 공안과 공익을 방해하는 종교는 단속한다는 취지였다. 이에 근거하여 일본제국정부는 당시 일본의 33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파를 ‘하나의 교회’(교단)로 통폐합하여 「일본기독교단」(United Church of Christ in Japan)을 설립했다. 참고로 1945년에는 한국교회에도 동일한 것을 요구하여, 그 당시 교역자들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 교단의 신앙적 신학적 특징은 교단 헌법 제6조 그리스도인의 생활강령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황국의 도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철저하게 각자의 임무를 다하여 황운을 부익하고 섬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황국을 위한 길에 있다고 가르쳤던 교단은 황국의 도를 대동아공영권에 알리기 위하여 전국 교인들을 대상으로 「현대판 사도적 서한」을 1943년 5월에 공모 공시하여, 그해 10월 28일 입선작을 선정하였다. 입선된 서한을 그 당시 교단의 통리였던 토미타 미쯔루(富田滿)가 자신의 이름으로 대동아공영권 산하의 각 교회에 발송한 것이다.
3. 이 서한에 나타난 일본기독교단의 교회관
먼저 당시 일본기독교단의 교회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일본교회는 전 세계를 지도하고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일본의 국체(國體)라고 생각하였다. 이 국체란 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적 질서, 즉 천황에 의한 통치를 말한다.
천황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자손으로 현인신(現人神)이기 때문에, 천황에게는 신으로부터 수여받은 영구한 일본 통치권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현인신인 천황의 지배를 받는 일본이야 말로 정의와 공영이라는 아름다운 나라를 동아(東亞)의 온 세상에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확립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천황의 나라인 일본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최고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대동아(大東亞)는 대동아의 전통과 역사와 민족성에 적합한 ‘대동아적 그리스도교’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이 서한의 내용
‘대동아적 그리스도교’를 확립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일본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은 천황 즉위 2천 6백년을 기념하는 「황기2천6백봉축전국기독교신도대회」 (皇紀二千六百奉祝全國基督敎信徒大會)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에 앞서 1940년 10월 17일, 신무천황즉위기원 2600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 약 2만 명의 교인들이 모여, 궁성요배의 국민의례로 시작하여 천황을 찬양하는 찬송가를 만들어 불렀고, 식이 끝나자 교인들은 메이지신구(明治神社)에 참배하였다. 이 대회는 “오등(吾等)은 전기독교회의 합동을 이루어갈 것을 기약한다”고 선언하였다. 「일본기독교단」은 이 서약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일본의 모든 개신교 교파들은 하나님과 국가 앞에서 각 교파의 전통, 신학, 관습, 특징, 기관, 교리 등의 모든 차별과 상이를 불식시키고, 외국선교사들의 정신적 물질적인 원조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며, 모든 교파적인 편파를 없애고 하나로 단결하여 “한 나라 한 교회”(一國一敎會)를 만들어, 세계교회 역사상 선례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하나의 교회’를 성립시킬 것을 다짐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며, 일본국체의 존엄무비(尊嚴無比)한 기초에 입각하여 천황이 행하는 정치의 길과 그 윤리를 몸에 익힌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매일 동방요배(東方遙拜)라는 국민의례를 통해서 천황에게 절을 하며, “대일본은 신의 나라, 천황폐하는 현인신이시며, 우리는 천업익찬을 위해서 태어났고, 우리는 천업익찬을 위해서 죽고”라고 노래하며 맹세했다.
동방요배, 또는 궁성요배(宮城遙拜), 황거요배(皇居遙拜)는 천황이 있는 동쪽이나, 황궁을 향하여 먼 곳에서도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는 행위로, 기미가요(일본국가), 히노마루 게양(일본국기), 높은 사람의 초상이나 사진에 경의를 표하는 고진에이(御眞影)와 함께 거행되었다.
따라서 본 서한은 신의 나라 일본과, 그 나라를 다스리는 현인신인 천황의 천업을 이루어 가는 것이야 말로 성경이 주장하는 복음이므로, “천업”인 대동아공영권 수립을 위해서 대동아공영권에 속한 모든 교회가 이에 순종하고 따를 것을 종용하는 일명 “현대판 사도적 서한”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5. 이 서한에 대한 평가
이 서한은 일본기독교단이라고 하는 한 교회(교단)의 공식적인 문서이다. 그리고 신앙적 신학적 수치도 모르고 교회를 국가와 ‘자기동일화’(自己同一化)시킨 것은 삯군 교역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비난의 몫이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가 아니라, 세상의 이념과 권력에 지배를 받는 교회(교단)이다.
이 서한에는 신앙도 교회도 신학도 부재한다. 서한의 원안을 작성한 사람은 바르트 신학자 야마모토 카노우(山本和, 1909-1995)로서, 칼 바르트 신학을 차용하여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는 1900년 초기에 칼 바르트 신학이 소개되어 큰 영향을 미쳤다. 서한공모 심사 위원 중 한 사람은 쿠마노 요시타카(熊野義孝)는 일본의 대표적 조직 신학자였다.
그들이 빚어낸 신학은 국가의 목적 또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자기수단화였다. 때문에 그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교회는 인위적인 목적을 지향할 뿐이다.
오늘날 교회는 물질과 ‘자기동일화’를 시켜버림으로써, 교회의 믿음과 신학이 물질 중심적으로 종교화되어 버렸다. 교회는 한 사람의 종교적 야망이나, 한 집단의 이데올로기 또는 한 나라의 국가적 이념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세워져서는 안 된다.
마치는 말
하나님의 교회는 두 세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또는 국가, 사회) 앞에서 고백하는 자신들의 신앙고백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교회는 사유화된 욕심의 현장이 아니라 고백적 전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현대판 사도적 서한”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발신하고 있지 않는지 물어야 한다.
광복 69주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그들이 교회에 요구하는 것을 부둥켜안고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사회와 국가와 세상에 대하여 예언자적 직분을 감당하는 고백하는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한다.
참조 /
1. 오노 시즈오 지음, 김산덕 옮김, 『일본교회사』(서울: 칼빈아카데미, 2012년)
2. 일본기독교단이 ‘대동아공영권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은 http://rpress.or.kr/xe/359315에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