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제2 종교개혁과 장로교회 정치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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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종교개혁과 장로교회 정치제도

   <김영규 목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김영규 

장로교 교회정치 내용은 바른 신학을 주장한 신앙 선배들이 남긴 보물

   

한 국장로교회의 교회정치, 교회와 위정자 및 국가와의 관계는 장로교회로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1638년 제2 종교개혁에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1638년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기록에서 확인될 수 있는 대로, 1560년 8월 24일 의회의 결정에 의해서 로마교회와의 단교가 선언이 되고 그 때로부터 법적으로 개혁교회 가르침이 인정이 되며 관용이 되었다.

 

1560년부터 1567년까지 총 15차 총회 회록의 첫 기록들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 의회결정의 내용이 기록물들의 마지막에 첨부되었다. 따라서 실제로 1556년의 제네바 영국 피난민 교회의 신앙고백이나 예배 모범이 스코틀랜드 교회 안에서 인정이 되었어도 거의 32년 동안 스코틀랜드 교회는 주교 제도와 장로교 제도가 혼합되어 있는 ‘개신교’ 교회로 남아 있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스코틀랜드 교회가 법적으로 장로교회로 시작한 것은 1580-81년과 1590-92년의 총회의 개혁 과정들을 거치면서 1592년 6월 5일 의회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때 비로소 스코틀랜드 교회는 공적으로 교리, 정치, 권징 및 예배모범에 있어서 처음 장로교회로서 재가되어 세워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회의 재가는 국왕 편에서 힘으로 방해하는 시도들이 공허하게 됨으로 얻어진 결과에 불과했다. 즉 영국 국교회처럼 스코틀랜드 교회에 국왕 측에서의 개입에 의해서 주교정치가 세워지도록 하는 시도들이 계속되었다.

 

1597년부터 1602년까지 국왕의 어용 총회로 있다가 1592년 총회 이후 적어도 매년 한 차례 이상 소집되기로 한 총회가 더 이상 소집이 되지 못하고 1602년 제 66차 총회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후 총회가 이런 저런 명목으로 그 소집이 연기되다가 영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한 뜻 있는 19명의 목사들이 만나 총회를 구성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국왕의 총회 해산에 앞서 다음 날 의장이 독립적으로 파회 결정을 내린 사건으로 인하여 John Welsh를 포함한 6명 목사가 14개월 동안 성의 지하 감옥에서 생활하다가 불란서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8명은 잠시 동안 옥살이 하다가 스코틀랜드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며 국왕 권위에 직접 저항에 참여하지 않은 8명도 런던으로 소환되어 논쟁 과정을 통해 시험을 받은 후 불란서로 유배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왕에 의해서 소집된 1606년 총회에서는 노회마다 항존적 의장이 임명이 되는 제도 도입과 함께 1610년 총회에서 정식으로 주교제도가 도입이 되고 총회의 소집과 폐회가 국왕의 특권으로 위임이 되며 대회의 의장들이 국왕이 임명한 주교들이 되는 현실로 발전되었다.

 

그 후 1618년 Perth 총회에서는 주교적 예식들이 소개되고 강요되는 현실로 발전됨으로써 장로교회로 스코틀랜드 교회는 계속 수난을 겪게 된다. 그런 수난 중에 국왕과 독립적인 의회의 결정에 의해서 스코트랜드 교회가 장로교회로 다시 소집되고 세워지게 된 것은 1638년의 제2 종교개혁에 의해서이다.

 

이런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이 대영제국의 종교개혁으로 연장이 되어 개최된 총회가 웨스트민스터 총회이다.

영국의 주교정치는 그 성격에 있어서 교황정치와 비슷하지만, 엄연히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후자의 경우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교황이 교회 열쇠권을 가졌다면, 영국에서는 그 교회 열쇠권이 국왕 개인에게 속하는 주교정치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회에서는 로마 교황청에 그 열쇠권이 있다고 한다면, 성공회는 영국의 국왕에게 그 열쇠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교회가 장로교회로 그 정체성을 얻었던 것은 그와 같은 교회를 지지하는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전쟁 성패와 관련되었고, 역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포함한 대영제국의 종교개혁도 의회파와 왕당파와의 전쟁 중에서 진행된 사건이었다는 사실도 그 배경으로 중요하다.

 

이처럼 영국의 엄밀한 종교개혁과 그 뒤에 일어난 시민전쟁들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수난사에 있어서 많은 성직자들과 성도들의 저항 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폭발적인 저항은 에딘버러의 한 교회에서 1637년 7월 23일 Jenny Geddes라는 나이든 여성도가 의식을 집례하는 수석사제에게 의자를 던짐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으로 같은 해 여름에 출판된 길레스피(George Gillespie)의 위대한 저서(Dipute against the English Popish Ceremonies obtruded on the Church of Scotland, Edinburgh 1637, the title+the epistle+the prologue+the order+36+54+202+47pp+faults escaped in Part. 3)가 크게 불을 지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박학하고 예리한 분석과 증거들 및 논거들을 통해서 장로교 교회정치나 개혁의 내용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바른 신학을 가진 교부들과 옛 개혁 교회 성직자들의 일반적 주장들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일로 그의 저서들은 곧 바로 수집되어 태워버리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그럼에도 그의 저서는 장로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장로교 교회정치를 변호하는 다른 많은 저항의 책들이 뒤따르게 한 제2 종교개혁을 연 기념비적인 저서로 평가되고 있다.

 

그 저서를 펴낸 길레스피가 25세의 나이로 주교로부터 목사로 안수 받기를 거절하고 귀족들의 보호아래 가정 설교자로서 섬기고 있었던 준비된 개혁자이었던 점은 종교 개혁자 칼빈을 상기하게 한다.

이러한 저서를 읽고 논의하지 않고 장로교 교회정치와 그 종교개혁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