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억새풀_남은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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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동화>

억새풀

< 남 은 록 시인 동화작가 >  

 

   언덕 위에 억새풀이 모습을 드러냈다햇빛에 반짝이는 억새풀의 자태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가는 허리에 길고 멋진 풀잎이 바스락거리자 모두들 아가을이 왔구나 하며 억새풀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특히 그 은빛 머릿결은 참으로 윤기 나고 매혹적이어서 잠시 땀을 닦으려 길가에 멈춘 나그네들도 감탄을 내뱉었다.

   서늘한 산그늘 속에서 억새풀은 더욱 짙은 은빛을 뿜어냈다억새풀은 그 머릿결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냈다.

가을바람도 그런 억새풀이 마음에 들었다.

가을바람은 억새풀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때내가 머릿결 멋지게 빗어 줄까?”

정말그럼 너무 좋겠어잘 부탁할게.”

억새풀은 시원시원한 가을바람이 너무나 고마웠다.

어느 쪽으로 빗어 줄까동쪽서쪽아님 북쪽?”

미안하지만 내가 원하는 쪽으로 빗어 줄 수 있지우선은 남쪽.”

왜 남쪽이야?”

남쪽에 사는 내 친구들이 그리워서 그래.”

알았어잘 빗어 줄게.”

   가을바람은 억새풀이 원하는 남쪽으로 한참 동안 머리를 빗어 주었다억새풀이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너무나 애틋하고 아름답게 보였다가을바람은 어느덧 억새풀의 친구가 되어 사랑스럽게 그 머릿결을 빗어 주고 있었다.

   억새풀은 그리움이 벅차올라 무어라 혼자 서걱서걱 노래를 불렀다가을바람은 그 아름다운 노래를 실어 멀리 남쪽으로 보내 주었다.

다음날에도 가을바람은 억새풀 곁에 다가왔다.

오늘도 머리 빗어 줄까?”

그래고마워오늘은 서쪽으로 빗어 줘.”

?”

노을이 지는 쪽이 예뻐서 그래.”

   가을바람은 억새풀이 행복해 하는 모습이 좋아 열심히 머리를 빗어 주었다노을이 물들어 올 때 억새풀의 머릿결은 붉은 색을 띠며 남은 햇빛을 머금고 있었다억새풀은 또 노래를 불렀다가을바람은 그 노래를 멀리 서쪽으로 보내 주었다새들도 나무들도 억새풀의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다음날에도 가을바람은 억새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은 동쪽으로 빗어 줘난 해 뜨는 동쪽도 너무 좋아.”

   억새풀은 이제 당연하다는 듯이 가을바람에게 머리를 빗어 달라고 했다가을바람은 억새풀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머리를 빗어 주었다햇빛 가득한 얼굴로 행복해 하는 억새풀을 보며 힘든 줄도 몰랐다.

   날마다 가을바람은 억새풀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성껏 머리를 빗어 주며 곁을 지켜 주었다날이 갈수록 억새풀의 모습은 화려해지고 눈부신 은발을 찰랑이며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그러나 가을바람이 억새풀의 머리 손질을 얼마나 애써 아름답게 해 주고 있는지는 모두들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한 나그네가 억새풀 곁에 다가와 앉았다.

야아은발이 정말 아름답구나.”

아저씨도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호호.”

그럼네 모습을 보니 피곤이 싹 달아나는구나.”

먼 길을 가시나 봐요?”

고향을 찾아 가는 중이야고향 땅에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단다.”

나그네는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 있어나는 어서 가봐야 해그런데 남쪽으로 머리를 빗으면 더 아름다울 텐데남쪽은 내 고향이 있는 곳이거든?”

그래요제 친구들도 거기 사는데… 저도 사실 남쪽을 좋아해요.”

   억새풀은 가을바람에게 빨리 남쪽으로 머리를 빗어 달라고 했다가을바람은 열심히 머리 빗질을 해 주었다.

나그네가 떠난 뒤 새들이 재재거리며 날아왔다.

은발이 대단한데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머릿결이 있지?”

억새풀은 새들의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 새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

너희들도 역시 아름다운 건 알아보는구나?”

   억새풀은 우쭐해졌다.

새들이 물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니?”

비결은 무슨… 타고나야 되는 거지.”

억새풀은 머릿결을 찰랑댔다그 눈부심에 새들은 움찔 놀랐다.

부럽다이 주변에서는 네가 제일 멋진 거 같아그런데 기왕이면 동쪽으로 빗은 머릿결이 예쁘던데우린 아침 해 뜨는 쪽이 좋아.”

그래사실은 나도 동쪽이 좋긴 해.”

   새들의 말을 듣고는 억새풀은 가을바람을 재촉하여 얼른 동쪽으로 빗어 달라고 했다가을바람은 묵묵히 그렇게 해 주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건너편의 나무들이 억새풀을 칭찬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노을이 지는 서쪽으로 빗긴 머리가 가장 아름답더라고 했다억새풀은 가을바람에게 이번에는 서쪽으로 빗어 달라고 재촉했다가을바람은 서둘러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마자 흰 구름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 했다.

내가 공중에서 내려다봐서 정확히 말해 줄 수 있는데 말이지넌 북극성이 있는 북쪽으로 머리를 빗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걸 모르는구나?”

   흰 구름의 그 말을 듣고는 가을바람은 부랴부랴 다시 방향을 북쪽으로 돌렸다억새풀이 졸라대기 전에 먼저 재빠르게 움직인 것이다억새풀은 가을바람의 친절하고 민첩한 행동에 더욱 만족하며 마음이 흐뭇했다.

   그래서 억새풀은 가을바람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다하루 종일 동서남북으로 바꿔 가며 머리를 빗어 달라는 거였다억새풀은 모두의 칭찬이 듣고 싶어서 가을바람에게 시시각각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빗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더구나 쉬지 않고 계속 빗어 줘야 한다고까지 했다.

   가을바람은 억새풀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자신이 힘들고 지치더라도 억새풀만 행복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그래서 더욱더 힘을 내어 쉼 없이 잠도 자지 않고 시시각각 억새풀이 원하는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빗어 주었다.

   

   억새풀의 아름다운 모습은 절정에 이르렀다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억새풀의 찬란한 모습에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사람들이 모여들어 억새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새들은 여전히 날아가다 멈추어 억새풀을 구경하였다흰 구름도 억새풀의 빛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한참이나 머물렀다가 흘러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을바람은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쉴 틈 없이 일을 했기에 힘이 많이 빠졌다어느 날 가을바람은 억새풀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너무 지친 거 같아조금 쉬었다 하면 안 될까?”

무슨 소리야내 머릿결이 이렇게 눈부신데 지금 쉬면 어떡해?”

너무 자주 방향이 바뀌니까 힘이 부치는 걸?”

그게 뭐 힘든 일이라고너 이제 내가 싫어진 거구나?”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면 증명해 봐더 열심히 빗어 달라구.”

   가을바람은 억새풀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할 틈도 없이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억새풀을 만난 지 3개월이 넘었을 때 가을바람은 마침내 힘이 다 빠져나갔다그래서 숨을 헐떡이며 다시 억새풀에게 하소연했다.

헉헉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어머리 빗질 그만하자.”

그 말 진심이야?”

사실 요즘 내 몸이 이상해 도저히 힘을 낼 수 없어.”

그럼조금만 쉬고 다시 해.”

정말 미안해하고 싶어도 더 이상은 할 힘이 없어.”

싫어이제 와서 멈춘다고?”

   억새풀은 가을바람의 말을 끝까지 귀담아 듣지 않고 계속 머리를 빗어 줘야 한다고 징징대며 재촉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바람은 끝내 쓰러져 땅에 눕고 말았다그런 줄도 모르고 억새풀은 하늘을 향해 한껏 머리를 들고 자신을 뽐내고만 있었다억새풀의 발꿈치 옆에서 가을바람은 식어가는 몸을 가늘게 떨더니 형체도 없이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모든 것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억새풀의 머릿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그제야 억새풀은 자기 곁을 지켜 주던 가을바람이 사라진 사실을 알았다.

   다급해진 억새풀은 가을바람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수소문 해 봤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가을바람이 없으니 억새풀은 종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가을바람에 찰랑이는 억새풀의 찬란했던 아름다움을 누구도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새들은 억새풀 주변을 떠났다나무들도 더 이상 억새풀을 거들떠보지 않았다흰 구름도 그저 제 갈 길로 흘러가 버렸다나그네들의 발길도 뚝 끊겼다.  

   마침내 강하고 찬 다른 바람이 다가왔다억새풀의 몸은 말라 얼어붙고 은발도 한 올 두 올 빠지기 시작하며 초라해지고 말았다얼음이 얼고 잿빛 눈구름이 몰려오고 햇빛은 자주 얼굴을 감추었다온 몸을 떨게 하는 추운 날이 계속되었다.

   힘을 잃은 억새풀은 가을바람이 너무도 그리웠다지금까지 누군가를 그토록 그리워 한 적은 없었다남쪽의 친구들도 해 뜨는 동쪽도 노을 지는 서쪽도 북극성이 빛나는 북쪽도 그립지 않았다그 순간은 오로지 자신만을 다정하게 사랑해 주던 가을바람이 너무도 그리웠다억새풀은 소리 없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그 울음은 조용한 노래가 되어 텅 빈 들판과 얼어붙은 냇물을 따라 퍼져 나갔다쓸쓸한 언덕 위에 몇 올 남지 않은 억새풀의 은발이 내리는 눈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