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틈_남은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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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종섭>

틈 

< 남 은 록 시인 / 동화작가 >  

   오래된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있었다. 그런데 너무 굽이진 산길이라 자동차 이용객들이 항상 불평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근처에 터널을 뚫어 평탄하고 수월한 길을 만들었다.

그 후부터 옛길에는 인적이 끊겼다. 모두들 씽씽 새길로만 다녔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는 사이에 옛길은 많이 외로웠다. 폭설이 내린 겨울이 되자 꼼짝없이 혼자 눈을 덮고 봄을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골짜기에 눈이 녹았다. 옛길에게도 봄바람이 찾아왔다. 봄바람은 옛길의 얼굴을 살랑살랑 어루만져 주었다. 봄바람은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흙가루를 데려와 소개했다.

이 친구는 저쪽 새길을 뚫으면서 생긴 흙가루라네.”

?”

그래. 인적 드문 여기에 살고 싶대.”

옛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흙가루는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살 곳을 조금만 내주시면 안 될까요?”

옛길은 난처해졌다.

너희들은 우리 아스팔트 도로를 싫어하잖니? 우리 때문에 집을 잃거나 밑에 묻혀 버리잖아?”

봄바람이 끼어들어 말했다.

아스팔트 도로가 삭막하다고들 하지만 자넨 아니야.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길이라고 칭찬도 많이 받았잖아?”

다 옛날 얘기지.”

옛길의 얼굴색이 잠시 어두워졌다. 봄바람이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만은 흙가루를 받아 줄 줄 알았는데.”

초조한 흙가루가 다시 부탁했다.

옛길님. 제발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전 여기가 무척 좋아요.”

잠시 생각하던 옛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날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뭐 나도 딱히 거부할 이유는 없다만…”

정말요? 진심으로 감사 드려요.”

흙가루는 풀풀거리며 기뻐했다.

그런데 아스팔트 도로는 네가 살기엔 힘들 텐데? 비가 오면 쉽게 쓸려가 버릴지도 몰라.”

옛길은 여기저기를 살폈다.

가만 있자. 아무리 봐도 안전한 곳은 이 작은 틈밖에는 없는데 어쩌지?”

옛길은 한복판에 있는 어떤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틈은 사실 나의 상처란다. 금이 가고 갈라져 부서진 곳이야.”

! 그렇다면 옛길님의 상처를 제게 내어 주시는 거예요? 감사해요.”

흙가루는 밝은 얼굴로 옛길의 상처를 덮으며 새처럼 내려앉았다.

내 상처가 네가 살아갈 작은 틈이 된다면 더없는 보람이지 뭐.”

귀한 틈을 내주셔서 고마워요. 저도 옛길님의 상처를 최선을 다해 어루만져 드릴게요.”

봄바람은 참 잘 됐다는 듯 휘파람을 불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흙가루는 옛길의 틈 속에서 비를 맞으며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의 상처를 꽉 채워 주었다. 옛길도 그런 흙가루가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봄바람이 다시 날아왔다. 그 동안 잘들 지냈지?” 옛길과 흙가루는 누가 봐도 한 몸으로 보였다. 봄바람은 그 모습에 마음이 흐뭇했다.

, 깜짝 놀랄만한 손님을 또 모시고 왔지.”

그때 꽃씨가 조그마한 얼굴을 내밀었다. 한눈에도 가냘프고 여린 꽃씨였다.

봄바람이 진지하게 말했다.

힘없고 가여운 이 꽃씨를 좀 부탁할게.”

꽃씨는 수줍어서 말을 더듬으며 흙가루에게 말했다.

, 저에게 조금만 틈을 내어 주시면…”

그러자 흙가루가 기뻐 소리쳤다.

! 물론이죠! 틈을 드리고말고요.”

옛길과 봄바람이 껄껄대며 웃었다. 봄바람이 말했다.

흙가루야. 넌 꽃씨가 그렇게 좋아?”

그럼요, 제가 언제 꽃씨님을 모실 수 있겠어요?”

하하. 고맙다. 꽃씨가 잘 지낼 수 있도록 힘써 줘.”

흙가루는 꽃씨를 받아 안고 가장 좋은 틈에 들어가도록 해 주었다.

너무 누추하고 작은 틈이지만 꽃씨님이 행복하시길 빌어요.”

정말 고마울 뿐입니다.”

꽃씨는 감격해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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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산이 초록으로 덮였다. 이 초록 속에 옛길이 있고, 그 틈에 흙가루가 살고, 그 흙가루 틈에 싹이 돋아났다. 무더위가 지나면서 싹은 점점 키가 크고 줄기는 우아해졌다. 그리고는 가을이 왔다.

어느 날 잠에서 막 깬 옛길과 흙가루는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새벽빛 속에 찬란한 꽃송이가 피어나 있었던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흙가루가 말했다.

, 누구?…..”

호호, 제가 바로 그 꽃씨예요.”

, 그렇군요. 자세히 보니 맞네요.”

흙가루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꽃씨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흙가루님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됐어요.”

제 덕분이라뇨? 꽃씨님이 비좁은 틈에서 잘 견뎌 준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실 모든 건 옛길님 덕분이고요.”

옛길이 웃으며 말했다.

어허, 내 이름은 왜 나와? 나도 작은 틈 하나 내주었을 뿐이지. 모든 게 봄바람 덕분이라구.”

옛길과 흙가루와 꽃씨는 서로 칭찬하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꽃씨가 말했다.

봄바람님과 두 분께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전 사랑을 받기만 해서 미안한 마음이에요. 저도 누군가를 위해 틈을 내어 줄 수 있을까요?”

옛길이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멋진 질문이야. 하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정말요?”

그래. 잠시 후면 너도 누군가를 돕게 될 거야.”

꽃씨는 갸우뚱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침 안개가 흩어지며 숲이 점점 더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이슬 한 방울이 꽃씨의 얼굴에 맺혔다.

안녕? 난 아침 이슬이야.”

꽃씨는 이슬의 감촉에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나!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름도 예뻐!”

너에게 잠시 머무르고 싶은데 괜찮겠지?”

정말 그래 줄래? 그럼 내가 더 고맙지.”

꽃씨는 기뻐서 살짝 춤을 추었다. 아침 이슬은 비틀거리며 외쳤다.

어어! 이러지마. 자칫하면 흘러 떨어지겠어.”

! 미안. 너무 좋아서 그만……내가 잘 지켜 줄게.”

얼굴이 빨개진 꽃씨에게 아침 이슬은 조금 심각하게 말했다.

나는 잠시 후엔 떠나. 해가 뜨면 우린 사라지거든. 하지만 내 친구들은 아침마다, 내일도 모레도 찾아 올 거야. 그때도 네가 틈을 내주면 좋겠어.”

염려 마. 그건 내게 큰 복이야. 아침마다 생수를 주고 얼굴도 적셔 주고 내 눈물이 되어 준다면 내 아름다움은 더 빛날 테니까.”

햇빛이 숲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가만히 보니 이슬도 햇빛이 스며들 틈을 내주고 있었다. 꽃잎 위에서 아침 이슬은 햇빛을 품고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러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꽃씨는 맑은 얼굴로 숲속에 외쳤다.

내 이름은 이제부터 이슬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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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완전히 밝았다. 언뜻 나무들 사이로 청명한 가을 하늘이 보였다. 멀리서 웅성웅성 강물 흐르는 소리도 들려 왔다. 그런데 다시 들어 보니 그건 사람들 소리였다.

꽃씨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남녀노소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배낭과 카메라를 메기도 하고 어깨에 띠를 두른 학생들도 보였다. 그때 선두에 선 사람이 행렬을 세우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1회 옛길 걷기 대회 및 사진 콘테스트에 참석하신 여러분! 여기서부터 사진을 잘 찍으시면 되고요, 절대 식물들을 파손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즐겁게 사진을 찍기도 하고 길가에 앉아 쉬기도 했다. 모두가 조용한 숲이 되어 가는 옛길을 칭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 어린이가 소리를 질렀다.

우와! 여기 좀 와 보세요!”

사람들이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니 이런 놀라운 일이!”

아스팔트를 뚫고 꽃이 피었네?”

이건 작품 중의 작품이야!”

삽시간에 카메라 셔터 소리가 옛길에 가득 찼다. 아스팔트 한복판을 뚫고 솟아난 위대한 꽃이라고 모두들 감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꽃씨는 사람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위대해서 뚫고 나온 게 아니에요. 아스팔트 옛길님이 작은 틈을 내주었어요. 그 틈에 살게 된 흙가루님도 보잘것없는 내게 틈을 내주었어요. 그래서 내가 아름답게 피어난 거죠.”

꽃씨는 있는 힘껏 진한 향기를 뿜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넓은 여백. 그것이 바로 틈이에요.” <>